이천진 목사 (이대병설미디어고등학교 교목, 한국예배음악연구소 소장)
목차 Ⅰ. 한국인이 드리는 예배로의 예배갱신
1.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는 사건
2. 전통과 문화가 만나는 사건
3. 하느님 나라의 잔치를 맛보는 축제의 사건
Ⅱ. 한국찬송가로 드리는 예배로의 예배갱신
1. 토착화 신학과 한국찬송가
2. 한국교회 찬송가에 대한 비판
3. 한국인의 영성을 살리는 한국찬송가
Ⅲ. 새 하늘 새 땅을 여는 예배에 대한 분석
1. 예배유형에 대한 분석
2. 예배표현에 대한 분석
3. 찬송가에 대한 분석
Ⅳ. 새 하늘 새 땅을 여는 예배에 대한 제언
Ⅰ. 한국인이 드리는 예배로의 예배갱신
다음의 네 예배학자들은 한국교회 예배의 토착화에 대하여 동의하고 있다. 기독교장로회 예배학자인 박근원은 현대신학의 전환과 함께 예배를 새롭게 이해하고 갱신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제3세계 신학, 여성신학, 토착화신학의 등장으로 예배도 토착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박근원은 예배의 발전사는 토착화의 역사였다고 밝히고 있다. 예수교장로회 예배학자인 정장복은 예배의 토착화를 거부하는 것은 100년을 넘긴 우리 기독교 예배의식을 이방종교로 머물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예배의 토착화가 이루어질 때, 서양적인 그리스도가 이 땅의 그리스도가 되는 감회를 느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정장복은 이제 백 년을 넘긴 한국교회가 보다 활기찬 생명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기독교의 고유한 진리의 몸체에 한국의 옷을 입혀 보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예배의 토착화를 역설하였다. 기독교성결교 예배학자인 조기연은 초대교회라고 하는 기독교 공통 유산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동시에 각 전통의 특징을 살리는 예배, 그리고 각 나라와 문화에 속한 회중의 신앙과 영성을 잘 표현할 수 있는 예배를 이룩하는 것이 현대 예배의 주된 흐름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조기연은 전통과 문화, 이 두 가지를 잘 조화시킨 예배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모습의 예배라고 예배의 토착화를 주장하였다. 감리교의 예배학자인 남호는 기독교의 메시지를 한국의 종교적이고 문화적인 구조를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라고 하면서 예배가 한국인의 영적이고 신앙적인 것을 보다 깊고 넓게 담는 것이 중요하다고 예배의 토착화를 주장하였다. 그리고 남호는 변선환의 주장을 인용하였다. “한국 선교 도상에 서 계시는 그리스도는 문화적 종교적 제국주의자로서 군림하는 문화의 지배자가 아니라 오히려 한국 문화를 사랑하고 섬기는 문화의 종으로 역사하고 계신다.” 가톨릭과 개신교의 공식적인 입장도 예배의 토착화에 대하여 동의하고 있다. 가톨릭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발표한 「전례 헌장」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공동체의 신앙과 유익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문제에 관해서 교회는 엄격한 획일성을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교회는 다양한 민족과 국가들의 특성과 능력을 존중하고 배양한다. …그러한 것들을 예배에 수용하기도 한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예배학자인 추풍코는 예배의 문화화는 “예배의 본문과 의식들을 해당 지역의 문화 속으로 삽입하는 과정”이라고 정의하면서 예배의 토착화에 동의하고 있다. 세계교회협의회가 몬트리올에서 발표한 “예배보고서”도 예배의 토착화를 인정하고 있다. “기독교 예배의 토착화는 모든 시대 모든 장소에 요구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변형되고 거룩하게 된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다시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것이다.” 이러한 학자들의 주장과 가톨릭과 개신교의 공식적 입장에 근거하여 한국인이 드리는 예배로의 예배갱신을 고찰해보고자 한다.
1.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는 사건
정교회 신학자인 플로로프스키는 예배에 대하여 이렇게 정의하였다. “기독교 예배는 그것이 참된 기독교의 예배라면, 결코 독백이 아니라 대화이다.… 기독교 예배는 하느님의 부르심과… 그분의 전능하신 행위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다.” 감리교 예배학자인 폴 훈은 “기독교 예배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보여주신 하느님의 계시와 그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다.”라고 주장하였다. 루터교 신학자인 피터 부르너는 “예배란 우리 주 하느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으로서 인간인 우리는 기도와 찬송으로 그분에게 응답하는 것이며 그 외에 다른 것은 행해지지 않아야 한다.”고 하였다. 성공회 신학자인 언더힐은 “예배는 그것이 어떠한 수준과 형태를 취하고 있든지 간에 창조주에 대한 피조물의 응답이다.”라고 하였다. 존 헉스터블은 “기독교의 예배란 하느님과 그의 백성과의 대화이다.” 라고 하였다. 지글러는 “기독교의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느님 자신의 인격적인 계시에 대한 인간들의 인격적인 신앙 안에서의 정성어린 응답이다.”위에서 열거한 여섯 신학자들의 예배에 대한 정의를 종합하면, 예배는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는 사건이다. 하느님과 인간의 만남은 언어, 노래, 이미지, 마음(영성)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한국인이 하느님과 깊이 만나려면, 한국인의 언어, 한국인의 노래, 한국인의 이미지, 한국인의 마음과 영성으로 만나야 한다. 플로로프스키와 존 헉스터블은 대화를 강조하였다. 한국인이 하느님과 깊은 대화를 하려면, 한국인의 언어로 대화를 할 때에 가능하다. 폴 훈과 부르너, 언더힐은 계시와 응답을 강조하였다. 진정한 응답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러 나오는 것이다. 남의 응답을 번역하여 읽는 것은 진정한 응답이 아니다. 지글러는 정성어린 응답을 강조하였다. 정성어린 예배는 나를 드리는 것이다. 나를 헌신하는 것이다. 나의 언어, 나의 노래, 나의 마음을 드리는 것이 정성어린 예배요, 정성어린 응답이다. 한국인의 언어, 한국인의 노래, 한국인의 이미지, 한국인의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가 바로 한국인이 하느님과 깊이 만나는 “한국인이 드리는 예배”이다.정장복은 「예배의 신학」에서 이렇게 이야기하였다.이 대화는 어느 주일 오후에 미국의 대표적인 교단본부에서 찾아온 의식이 있는 젊은 목사와의 사이에서 있었던 것이다.… 한국교회를 분명히 갔었는데 예배당 건물과 내부구조가 미국의 것과 조금도 차이가 없었고, 회중들이 부르는 찬송도 자신들이 부르는 것과 같은 것이었는데 단지 거기 모인 사람들만이 미국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대답이었다. 그래서 자신은 한국 땅에서 한국 사람들과 함께 서구식 예배당에서 서구 찬송을 부르면서 서구식 예배를 드렸다고 말하였다.
2. 전통과 문화가 만나는 사건
조기연은 “예배는 전통과 문화라는 두 가지 축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전통은 기독교 예배 전통을 말하는 것이고, 문화는 특정 예배 공동체가 속한 지역의 언어, 관습, 정서 등을 말하는 것이다. 기독교 예배 전통은 초대교회의 예배 전통, 동방 교회의 예배 전통, 서방 교회의 예배 전통, 종교 개혁적 예배 전통 등이 있다. 초대교회 예배 전통의 특징은 말씀과 성만찬으로 이루어진 예배의 이중적 구조이다. 이러한 초대교회의 예배 전통의 특징에 대하여 박근원은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적인 배경과 그 당시의 지정학적인 요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구원행위를 이렇게 믿도록 했으며 그 신앙의 표현이 이런 예배로 표현되게 하였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초대 기독교 예배를 연구한 남호는 “기독교 예배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로부터 비롯되었다. 한 종교의식은 그 종교가 속해 있는 문화의 표현 양식을 통해 나타난다.”고 하였다. 동방교회 예배 전통의 특징은 예배 행진, 입당송으로 부르는 삼성창 등이 특징이다. 박근원은 동방교회 예배 전통의 특징에 대하여 “예배 행진은 이 도시의 정치적인 행렬과 아주 대조를 이루는 것이었다.”라고 하면서, 동방교회 예배 전통이 헬라어와 그 문화를 포용한 것이라면, 서방 교회의 예배 전통은 라틴어와 그 문화를 포용한 예배의식이다. 라고 하였다. 박근원은 서방교회의 예배 전통의 특징에 대하여 “로마에서 발전된 특유의 요소는 사순절을 비롯한 교회의 절기행사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라고 하면서 “서방교회의 예배 전통은 로마의 예전과 프랑스-독일의 관습과 정신이 합류하여 태동한 것”이라고 하였다. 종교 개혁적 예배 전통의 두드러진 특징은 말씀의 강조이다. 그래서 루터는 독일어 찬송과 독일어 미사를 시도하였다. 이러한 특징은 예배가 성만찬 중심이 되어, 미신적인 요소까지 곁들이게 되고, 미사가 알아듣지 못하는 라틴어로 행해지면서, 설교가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고, 성서봉독마저도 생략되는 상황에서 비롯된 예배 전통이다.위에서 열거한 네 신학자들의 주장을 종합하면, 예배는 전통과 문화가 만나는 사건이다. 서양인들은 기독교 전통과 자신들의 문화와의 깊은 만남을 통하여 생동감 넘치는 예배 전통을 창조하였다. 한국교회에서 드리는 예배가 역동적인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기독교 전통과 한국 문화가 깊이 만날 수 있을 때에 가능하다. 서양의 언어, 서양의 노래, 서양의 예배 신학으로 드리는 예배는 한국인이 드리는 예배가 아니다. 서양인이 드리는 예배를 흉내 내는 것에 불과하다. 기독교 전통과 한국 문화가 깊이 만나는 예배, 한국 문화로 표현되는 예배가 바로 “한국인이 드리는 예배”이다.조기연은 「예배갱신의 신학과 실제」에서 이렇게 주장하였다.전통은 예배의 우주성을 확보해 주며 문화는 예배의 다양성을 제공해 준다. 만일 예배가 전통을 상실하게 된다면 그 예배는 기독교 예배로서의 정체감을 상실하게 될 것이며, 그렇다고 문화를 도외시할 때는 그 예배가 회중에게 아무런 의미도 주지 못하는 예배가 될 수밖에 없다. 전통과 문화, 이 두 가지를 잘 조화시킨 예배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모습의 예배라고 할 수 있다.
3. 하느님 나라의 잔치를 맛보는 축제의 사건
박근원은 예배가 축제의 사건이라고 주장하였다. “예배는 본래 부활의 축제였다. 초대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축하하는 의식으로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런 축제적인 예배의 성격이 오랜 역사를 통해서 ‘의식’이 되고 ‘예전’화 되면서 원래의 역동적인 성격이 희석되거나 퇴색되어버린 셈이다.” 조기연은 “기독교 예배의 출발은 안식 후 첫날에 주님의 부활을 기뻐하며 제자들이 모여서 떡을 떼었던 데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인식하자. 그들에게 예배는 부활의 기쁨을 나누는 장이요, 하느님 나라의 잔치를 맛보는 자리였다. 이러한 기쁨과 감격과 대망의 축제가 바로 오늘 한국 교회의 예배가 되어야 한다.” 고 하였다.두 예배학자의 주장을 종합하면, 예배는 하느님 나라의 잔치를 맛보는 축제의 사건이다. 예배는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는 사건이기 때문에 축제의 사건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축하하는 사건이기 때문에 축제의 사건이다. 축제는 억지로 할 수 없다. 마음이 움직여야 가능하다. 히브리인들은 바빌론 포로지에서 노래를 부를 수 없었다. 우리가 바빌론의 강변 곳곳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면서 울었다. 그 강변 버드나무 가지에 우리의 수금을 걸어 두었더니, 우리를 사로잡아 온 자들이 거기에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고, 우리를 억압한 자들이 저희들 흥을 돋우어 주기를 요구하며, 시온의 노래 한 가락을 저희들을 위해 불러 보라고 하는구나. 우리가 어찌 남의 나라 땅에서 주의 노래를 부를 수 있으랴. (시편 137:1-4)히브리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기쁨의 노래를 불렀다. 주께서 시온에서 잡혀간 포로를 시온으로 돌려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을 꾸는 사람들 같았다. 그 때에 우리의 입은 웃음으로 가득 찼고, 우리의 혀는 찬양의 함성으로 가득 찼다. (시편 126:1-2)서양인의 언어로, 서양인의 노래로, 서양인의 고백으로 드리는 예배의 자리에서는 축제가 일어날 수 없다. 그것은 내가 없는 식민지 예배이기 때문이다. 사대주의에서 벗어나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을 감사하면서 하느님이 주신 한국인의 언어로, 한국인의 노래로, 한국인의 고백으로 드리는 예배가 “한국인이 드리는 예배”이다. 내가 한국인임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하느님 나라의 잔치를 맛보는 축제의 사건이 바로 “한국인이 드리는 예배”이다.성실교회 목사이고, 성실예배교육문화원 대표인 이정훈은 「한국의 그리스도인을 위한 절기예배 이야기」에서 이렇게 이야기하였다.나는 문득 축제가 사라진 오늘 우리 교회를 생각했다. 사람은 잔뜩 남아 있는데 축제가 사라졌다. 아니나 다를까, 젊은이들이 하나, 둘, 교회를 떠난다고 한다. 축제가 없어서 떠나는 젊은이들…!
Ⅱ. 한국찬송가로 드리는 예배로의 예배갱신
1. 토착화 신학과 한국찬송가
토착화 신학자들은 기독교적 영성(言)과 한국적 경건(行)의 일치를 위하여 한국적인 것, 즉 한국의 고유성, 한국적 경건, 한국인의 영성, 한국의 종교 문화적 a priori를 찾아 나섰다. 윤성범은 이러한 한국적인 것, 즉 한국의 고유성, 한국적 경건, 한국인의 영성, 한국의 종교 문화 a priori를 율곡의 성(誠)에서 찾으려고 하였고, 유동식은 삼국사기(三國史記)의 풍류(風流)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김광식은 윤성범과 유동식의 토착화 신학에 대하여 유교와 무교라는 한국 문화의 일단(一端)에서 한국의 고유성을 찾으려고 한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한국문화의 전체성이 나타나 있는 건국신화에서 한국의 고유성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한국음악의 귀중한 문헌인 15세기 후반 조선조 성종 때의 「악학궤범」서문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음악이란, 하늘에서 나와 사람에게 머무르고, 공허에서 발생하여 자연에서 이루어진다.” 악학궤범 서문은 음악이 하늘에서 나와 사람에게로 왔다고 밝히고 있다. 하늘의 질서에 이미 존재했던 것을 인간이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늘의 세계에도 존재하면서 동시에 한국인에게도 존재하는 한국의 고유성, 한국적 경건, 즉 한국인의 영성, 한국의 종교 문화 아프리오리를 한국 전통음악에서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이성천은 한국음악이 B.C. 2000년경에 아주 우수한 형태로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예기」「통전」「백호통」의 기록을 근거로 밝히고 있다. 그리고 한국음악은 종교와 더불어 생성 발전하였으며, 선사시대에도 음악은 종교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고 주장하였다. 한국의 전통음악 속에는 한국의 고유성, 한국적 경건, 한국인의 영성이 흐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한국의 고유성, 한국적 경건, 한국인의 영성은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하느님의 형상이요, 하느님의 이미지이다.한국인의 신앙고백을 한국의 고유성, 한국적 경건, 한국인의 영성이 담겨있는 한국음악의 선율로 부르는 찬송가가 바로 한국 찬송가이다. 흔히, 우리가락 찬송가, 국악 찬송가라고 부르는데, 이러한 용어는 모든 나라가 모두 사용할 수 있는 용어이기 때문에 정확한 용어가 될 수 없다. ‘한국인 찬송가’와 ‘한국 찬송가’는 구분해야 한다. 한국인이 서양의 신학 방법론으로 전개한 신학을 한국 신학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한국인이 한강에서 그린 서양화를 한국 미술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한국인이 서양 선법으로 창작한 음악을 한국음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따라서 한국인이 작곡한 찬송가는 ‘한국인 찬송가’이고, 한국 전통음악 선법으로 작곡한 찬송가는 ‘한국찬송가’이다. 장단만 한국음악의 장단을 사용하고 ‘우리가락 찬송가’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는데, 장단과 함께 선율도 한국음악의 ‘선법’을 사용할 때에 ‘한국찬송가’라고 할 수 있다.
2. 한국교회 찬송가에 대한 비판현재 한국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찬송가에 한국인이 작곡한 찬송가가 17곡 수록되어 있다. 전인평은 한국 전통 음악의 선법을 5가지로 분류하였다. 한국인이 작곡한 찬송 17곡을 위의 5가지 선법으로 분석해보면, 311장(산마다 불이 탄다 고운 단풍에)은 제2선법(라, 도, 레, 미, 솔)에 가까운 찬송가라고 볼 수 있고, 378장(이전에 주님을 내가 몰라)과 493장(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은 제3선법(도, 레, 미, 솔, 라)에 가까운 찬송가라고 볼 수 있으며, 나머지 14곡은 한국 전통 음악의 선법에 해당되지 않는다. 그래서 한국인 찬송가 17곡 중에서 3곡을 제외한 14곡은 한국인이 창작한 ‘서양 찬송가’이다. 통일 찬송가 총 558곡 중, 한국인이 작곡한 찬송가 17곡 중에서 3곡만이 한국 전통 음악의 선법에 가깝게 작곡된, ‘한국 찬송가’에 가까운 찬송가라는 사실은 찬송가의 사대주의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현재 한국 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찬송가」(통일, 1983년)에 외국 국가의 가락을 빌려서 수록한 곡이 4곡이다. 77장(전능의 하느님)은 러시아 국가이고, 79장(피난처 있으니)은 영국 국가이고, 127장(예수님의 귀한 사랑)은 독일 국가이고, 245장(시온성과 같은 교회)도 독일 국가이다. 그런데 영국 찬송가에는 영국 국가의 가락이 없고, 독일 찬송가에도 독일 국가의 가락이 없다. 우리는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는 멋진 신앙고백이 담겨있는 애국가를 부르지 않으면서 외국의 국가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이 주신 한국적인 것에 대하여 감사하지 못하고 이렇게 자기를 비하하고 있는 것은 비 신앙적인 모습이다. 외국의 세속가요 가락을 빌려서 수록한 곡이 8곡이다. 1장(만복의 근원 하느님)은 프랑스 가요에서 빌린 찬송이고, 145장(오 거룩하신 주님)은 독일 가요에서 빌린 찬송이다. 미국 가요에서 빌린 찬송은 88장(내 진정 사모하는), 264장(예수의 전한 복음), 314장(기쁜 일이 있어 천국 종 치네), 390장(십자가 군병들아), 407장(그 영원하신 사랑은), 482장(내 기도하는 그 시간)이다. 외국민요 가락을 빌려서 수록한 곡이 23곡이다. 영국 민요에서 빌린 찬송은 21장(다 찬양하여라), 117장(만백성 기뻐하여라), 173장(불길 같은 성신여), 467장(내게로 와서 쉬어라)이고, 스코틀랜드 민요에서 빌린 찬송은 80장(주 하느님 크신 능력)과 338장(천부여 의지 없어서), 545장(하늘가는 밝은 길이)이다. 533장(내 맘의 주여 소망되소서)은 아일랜드 민요에서 빌린 찬송이고, 독일 민요에서 빌린 찬송은 14장(구세주를 아는 이들), 33장(온 천하 만물 우러러), 48장(만유의 주재), 57장(즐겁게 안식할 날), 225장(새 예루살렘 복된 집), 430장(내 선한 목자), 517장(생명 진리 은혜 되신)입니다. 프랑스 민요에서 빌린 찬송은 125장(천사들의 노래가), 160장(할렐루야 할렐루야)이고, 네덜런드 민요에서 빌린 찬송은 32장(오 하느님 우리의 창조주시니), 39장(주 은혜를 받으려)이다. 40장(주 하느님 지으신 모든 세계)은 스웨덴 민요에서 빌린 찬송이고, 454장(주 사랑안에 살면)은 핀랜드 민요에서 빌린 찬송이다. 그리고 113장(그 어린 주 예수)과 405장(나 같은 죄인 살리신)은 미국 민요에서 빌린 찬송이다. 이렇게 우리는 외국의 민요를 23곡이나 빌려다가 찬송으로 부르고 있지만, 우리의 민요는 한 곡도 찬송으로 부르지 않고 있다. 오히려 미국 연합 장로교회에서는 한국의 대표적 민요인 ‘아리랑’의 가락을 찬송가로 부르고 있다. 외국 오페라 곡을 빌려서 수록한 곡이 7곡이다. 58장(이 날은 주의 정하신)은 오페라 ‘알렉서지스’ 서곡에서 빌린 찬송이고, 61장(주여 복을 비옵나니)은 가극 ‘마을의 점장이’에서 빌린 찬송이다. 94장(예수님은 누구신가)도 가극 ‘마을의 점장이’에서 빌린 찬송이고, 124장(한 밤에 양을 치는 자)은 오페라 ‘시로’의 아리아에서 빌린 찬송이다. 371장(삼천리반도 금수강산)은 오페라 ‘루치아’에서 빌린 찬송이고, 431장(내 주여 뜻대로)은 오페라 ‘마탄의 사수’에서 빌린 찬송이다. 그리고 520장(주의 귀한 말씀을)은 중세 가극 ‘나귀의 잔치’에서 빌린 찬송이다. 외국 교향곡을 빌려서 수록한 곡이 3곡이다. 13장(기뻐하며 경배하세)은 베토벤의 심포니 9번에서 빌린 찬송이고, 17장(내가 한 맘으로)은 하이든의 교향곡 D장조의 느린 악장에서 빌린 찬송이다. 287장(오늘 모여 찬송함은)도 베토벤의 심포니 9번에서 빌린 찬송이다. 미국의 소방대원 행진곡 가락도 빌려서 수록한 찬송도 있다. 388장(마귀들과 싸울지라)은 미국의 소방대원 행진곡에서 빌린 찬송이다. 미국의 소방대원 행진곡으로 작곡한 가락을 남북전쟁 때, 북군(Yankee)이 “남군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를 신 사과나무에 목을 달고”라는 가사로 노래한 곡이다. 외국 피아노곡을 빌려서 수록한 곡이 3곡이다. 126장(천사 찬송하기를)은 멘델스존의 작품 68 ‘축제의 노래’에서 빌린 찬송이고, 176장(영화로신 주 성령)은 고트솨크의 독주곡 ‘마지막 희망’에서 빌린 찬송이다. 그리고 267장(주 날 불러 이르소서)은 슈만)의 야상곡에서 빌린 찬송이다. 미국 학교 노래 책의 가락을 빌려서 수록한 찬송도 있다. 370장(어둔 밤 쉬 되리니)은 미국 보스턴 공립학교 노래 책의 곡을 빌린 찬송이다. 이 찬송가에는 신앙적인 용어가 전혀 없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한국교회 찬송가는 한국음악은 천하고, 서양의 노래는 세속노래도 거룩하다고 하는 사대주의 찬송가이다.
3. 한국인의 영성을 살리는 한국찬송가이성천은 한국전통음악의 정신을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고 하였다. 한국음악에는 하느님과 인간이 다른 현실의 존재이지만, 하나가 된다는 정신이 있다. 하느님과 인간이 합일을 이룰 때에 우리의 삶 속에는 ‘신명’이 일어난다. 김광식은 이것을 ‘불이(不二)의 영성’이라고 하였다. 찬송은 영적인 기운을 살리는 노래이다. 히브리인들은 바벨론 포로지에서 자기들의 삶의 이야기를 자기들의 가락에 실어 찬송을 부르면서 믿음을 키웠다. 그것이 시편이다. 한국인들의 영적인 기운을 살리기 위해서는 한국인들의 삶과 역사와 이야기를 담고 있는 한국인들의 신앙고백을 한국의 가락에 담아 부를 때에 가능하다. 우리는 이제 하느님이 주신 이 땅에서 한국인의 가치들을 소중히 여기며, 숨겨진 ‘한국인의 영성’에 불을 지피는 우리의 가락을 불러야 한다. 그때, 죽어 가는 한국인의 영성이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다. 한국인의 영성이 담긴 한국찬송가로 드리는 예배가 “한국인이 드리는 예배”이다.
Ⅲ. 새 하늘 새 땅을 여는 예배에 대한 분석
1. 예배유형에 대한 분석
박근원은 예배유형을 예루살렘의 예배 유형, 콘스탄티노플의 예배 유형, 로마의 예배 유형, 종교개혁적 예배 유형(루터, 츠빙글리, 부처, 칼빈, 존 녹스)으로 나누고 있다. 예루살렘의 예배유형은 말씀의 예전과 다락방의 예전으로 이루어진 예배유형이다. 말씀의 예전에는 성서봉독, 권면, 기도, 시편과 찬양의 순서가 있고, 다락방의 예전에는 인사, 봉헌, 성별의 기도, 분병례, 성만찬에의 참여, 폐회 등의 순서가 있다. 새 하늘 새 땅을 여는 예배는 예루살렘 예배유형에 아주 충실한 예배유형이다. 말씀의 예전과 성만찬의 예전이 균형을 이루고 있는 예배유형이다. “성만찬에는 두 가지 기원이 있다. 하나는 초기 유대교-기독교 공동체의 즐거운 교제로서의 식사가 그것이고, 또 하나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기념으로서의 식사를 말한다.” 새 하늘 새 땅을 여는 예배는 후자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한국문화에 익숙한 성만찬은 전자이다. 한국인들은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을 즐겼다. 생명을 사랑하는 영성이 뛰어난 한국 여성의 예배에서 공동식사로서의 성만찬의 전통을 회복시키는 것은 의미가 있다..
2. 예배표현에 대한 분석
새 하늘 새 땅을 여는 예배 순서에 한국문화에 익숙한 표현들이 있다. 첫째, 징울림이다. 한국인들은 징이 울리면, 시작하는 느낌을 갖는다. 새 하늘 새 땅을 여는 예배에서 징울림은 기원과 연결되어 있다. 조기연은 예배는 우주적 성격이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자연 세계가 예배 참여자들과 함께 만나 상통과 합일을 이루는 우주적 사건이라고 하였다. 한국의 전통사상에서 우주 공동체를 삼재(三才)로 표현한다. 삼재는 천(天), 지(地), 인(人)이다. 모든 우주 세계가 예배에 하께 참여한다는 의미에서 첫 번째 징울림은 하늘이 하나님을 부르는 소리, 두 번째 징울림은 땅이 하나님을 부르는 소리, 세 번째 징울림은 사람이 하나님을 부르는 소리를 나타내는 것도 모든 우주가 함께 예배를 드린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 둘째, 말씀 나누기이다. 전통적인 예배에서 설교는 일방적인 선포이다. 그래서 회중은 구경꾼이 되어버려서 귀를 닫기도 한다. 한국의 판소리는 구경꾼이 없다. 소리를 하는 소리꾼과 청중이 함께 분위기를 만들어 간다. 취임새를 통하여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기도 하고, 무언의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이것은 소리꾼과 청중이 서로에 대하여 마음을 열 때에 가능하다. 말씀 나누기는 일방적 선포가 아니라. 서로 의사를 나눈다는 면에서 한국 문화에 익숙한 표현이다. 셋째, 몸으로 드리는 찬양이다. 전통적인 교회 예배에서 춤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축제성보다 엄숙성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전통적인 제의에서는 춤이 있었다. 그래서 몸으로 드리는 찬양은 한국 문화에 매우 익숙한 예배 표현이다. 하나님께 내 몸을 산 제물로 드린다는 면에서 의미가 있는 예배 표현이다.
3. 찬송가에 대한 분석
<표1>번호제 목분류선율장단번호제 목분류선율장단1오소서 오소서한국육자백이중모리32오! 자유서양2우리가 새 날을 낳으리라!서양33가라 미리암서양3사랑과 평화를 위한 노래한국메나리자진모리34예수 타령한국메나리자진모리4시편124편서양35통일 아리랑한국경토리세마치5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서양36한반도 온 백성한국경토리세마치6새 하늘과 새 땅서양37무화과 잎이 마르면서양7새로운 만남한국경토리굿거리38들어주소서서양8우리의 만남 속에서양39내게 있는 향유 옥합서양9예수는 친구시라한국경토리굿거리40무엇으로 감사드릴까서양10야훼! 우리 하나님!한국경토리세마치41내가 눈을 뜨게 하소서서양11이 떡을 나눔은서양42내일을 위한 노래서양12예수님이 좋은 걸 어떻합니까한국경토리굿거리43우리를 이끄소서서양13평화의 아침을 여는 이서양44거룩 거룩 거룩서양14그의 죽음으로서양45하나님 어린 양서양15강물처럼 흐르게 하소서서양46기다리는 아기 예수여서양16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서양47구주예수 오신다한국경토리자진모리17달리다쿰서양48우리의 만남 속에서양18성령이여 오소서한국육자백이중모리49좋으신 하나님서양19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서양50좋은 일이 있으리라한국경토리굿거리20하나님 나라를 위한 기도서양51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자서양21새 하늘과 새 땅서양52하늘 나는 새를 보라한국경토리굿거리22우리를 이끄소서서양53우리가 새날을 낳으리라서양23평화의 기도서양54여기 오소서 내주여서양24세상은 평화 원하지만서양55당신을 향한 노래서양25홀로 아리랑한국경토리세마치56거룩송서양26우리 숨결에 언제나서양57희년을 향한 우리의 행진서양27그의 나라 일구는 희망의 손길서양58광복절 노래 서양28우물가의 여인처럼서양59우리 안에 주의 생명한국경토리굿거리29천국의 춤서양60탄일종서양30예수님은 누구신가한국메나리중모리61예수님 생일을 축하해요서양31사막에 샘이 넘쳐 흐르리라서양찬송가 분석의 범위는 「새 하늘 새 땅을 여는 예배」에서 부른 찬송가와 2003년 4월부터 2005년 4월까지의 예배에서 부른 찬송들을 분석하였다. 그 중에 통일 찬송가에 수록되어 있는 찬송은 범위에서 제외하였다. 통일 찬송가에 있는 찬송가 중에서 부른 찬송가는 모두 서양 찬송가이기 때문에 포함할 필요가 없었다. 분석의 내용은 한국음악의 선법으로 한국음악의 범위에 들어가는지를 분석하였다. 분석한 결과, 총 61곡을 불렀는데, 그 중 한국찬송가라고 할 수 있는 곡은 16곡이다. 나머지 45곡은 서양음악 선법으로 작곡된 곡이다. 한국찬송가가 26,2%, 서양찬송가가 73.8%이다. 통일 찬송가에 수록되어 있는 찬송가를 포함하면, 서양 찬송가의 비율은 훨씬 늘어난다. 한국찬송가 50%, 서양 찬송가 50%를 제안한다. 하느님은 동양과 서양을 지으신 분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우주적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우주적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Ⅳ. 새 하늘 새 땅을 여는 예배에 대한 제언
정보화 사회에서 인류는 컴퓨터를 통하여 많은 것을 보고 있지만, 정작 중요한 하느님과 자연과 사람을 보는 눈을 잃어버리고 있다. 인류는 더 고독해지고 있고, 더 이기적인 인간이 되어 가고 있고, 공동체성을 상실하고 있다. 지구도 오존층의 파괴와 지구의 온난화로 인하여 죽어가고 있다. 위기에 처한 인류는 이제 곧 제4의 물결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제4의 물결은 영성의 물결이다. 영성이란 하느님을 섬기고, 자연을 섬기고, 사람을 섬기는 마음과 행위이다. 행위가 없는 것은 영성이 아니다. 하느님과 자연과 사람을 섬기는 영성의 물결이 밀려오지 않고서는 생명의 문제를 해결할 길이 없다. 환경문제, 식량문제, 물 문제, 도덕적 타락의 문제 등을 해결할 수가 없다.
1) 미래 사회에 절실한 영성은 하느님 나라의 영성, 나눔의 영성- 예수 그리스도의 영성이다.20세기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갈등의 역사였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이념의 대립은 수많은 하느님의 생명을 죽이는 죽임의 놀이였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갈등을 극복하는 제3의 길은 하느님 나라의 영성, 나눔의 영성이다. 이 나눔의 영성은 한국인의 영성이요, 십자가에서 피와 살을 나눈 예수 그리스도의 영성이다. 이 나눔의 영성의 물결이 밀려올 때, 우리는 평화의 나라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2) 미래 사회에 절실한 영성은 생태적 민주주주의의 영성, 살림의 영성- 성령의 영성이다.20세기는 자연과 인간이 갈등한 역사였다. 자연과 인간의 대립은 지구를 죽이는 죽임의 놀이였다. 자연과 인간의 갈등을 극복하는 제3의 길은 생태적 민주주의의 영성, 살림의 영성이다. 이 살림의 영성은 한국인의 영성이요, 우주를 창조하고 모든 생명을 살리는 성령의 영성이다. 이 살림의 영성의 물결이 밀려올 때, 우리는 생명의 나라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3) 미래 사회에 절실한 영성은 신명의 영성, 어울림의 영성- 하느님의 영성이다.20세기는 성, 인종, 지역, 세대, 이념의 갈등의 역사였다. 여성과 남성, 신세대와 기성세대, 전라도와 경상도, 북한과 남한, 동양과 서양의 대립은 인류의 행복을 죽이는 죽임의 놀이였다. 이어령 교수는 「그래도 바람개비는 돈다」라는 책에서 한국 문화의 원형을 仁의 문화라고 주장하면서 “사람(人)이 둘(二)이지만 하나로 어울리는 仁의 문화가 미래를 지배하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성과 세대와 지역과 인종의 갈등을 극복하는 제3의 길은 하느님(一)과 사람(人)과 자연(一)이 하나로 어울리는 신명의 영성, 어울림의 영성이다. 이 어울림의 영성은 한국인의 영성이요, 인간과 어울리기 위해 성육신하신 하느님의 영성이다. 이 어울림의 영성의 물결이 밀려올 때에 우리는 신명의 나라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미래사회에 세계에 절실히 필요한 영성을 한국인의 영성으로 보면서, 새 하늘 새 땅을 여는 예배에 제안한다. 첫째, 한국인이 세계를 위해 기여하고 봉사할 수 있는 한국인의 영성과 축제가 벌어지는 마당의 개념으로 예배를 구성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예배를 어울림의 마당 - 살림의 마당 - 나눔의 마당, 세 마당으로 나누어서 어울림의 마당에는 개회의 예전의 내용을, 살림의 마당에는 말씀의 예전의 내용을, 나눔의 마당에는 성만찬과 파송의 예전의 내용을 담는 것을 제안한다. 둘째, 여성과 한국인의 영성이라는 초점에 맞추어 찬송가를 창작하여 부르는 것을 제안한다. 한국의 여성을 위한 찬송가집을 편찬하는 것은 더 좋을 것이다. 이때, 찬송가 편집은 한국인 찬송가 50%, 서양인 찬송가 50%가 좋을 것 같고, 서양인 찬송은 미국과 유럽에 치우지지 말고, 아시아, 아프리카를 비롯한 전 세계의 노래를 균형 있게 편집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셋째, 메시야적 잔치인 공동식사, 하느님 나라의 잔치인 공동식사로서의 성만찬 전통의 회복을 제안한다. 한국교회의 성찬식은 너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슬픔에 치우쳐 있다. 함께 먹고 마시는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맛보는 성찬식의 회복을 제안한다. 넷째, 한국악기와 서양 악기의 조화를 제안한다. 한국악기 중에서 타악기 보다는 피아노와 잘 어울리는 피리나, 해금을 예배반주 악기로 사용할 것을 제안한다. 전 세계의 모든 악기가 하나님을 찬양할 때, 우주를 지으신 하느님을 하느님 되게 하는 것이다. 다섯 째, 한국교회 예배는 너무 정적이다. 예배는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이다. 기쁨의 자리이다. 기쁘면, 몸이 움직인다. 그것이 춤이다. 새 하늘 새 땅을 여는 예배에서 시도하고 있는 한국인의 영성이 담긴 춤을 더욱 더 발전시킬 것을 제안한다. 우주 모든 만물이 하느님과 함께 생명과 평화의 춤을 추는 기쁨과 축제의 예배를 기대한다.
Thursday, April 19, 2007
성찬의 4중 행위와 한국 교회 예배의 내일
성찬의 4중 행위와 한국교회 예배의 내일
김순환
들어가는 말
한국 개신교회의 대다수는 그 동안 교파와 교단에 상관없이 내용과 형태가 서로 크게 다르지 않으면서 설교가 중심이 된 예배를 드려왔다. 이런 양태에 이렇다할 큰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많은 교회들이 전통적인 예배에 대한 관심이나 동시대적인 상황을 고려한 예배에 대한 관심을 확대해 가면서 예배의 다양성이 눈에 띄게 늘어가고 있는 현실이다. 그 가운데는 전자와 같이 예배의 예전적인 측면의 중요성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고 성찬의 위상을 회복하고자 노력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후자와 같이 현대적인 구미를 살려 예배에서 형식의 자유를 크게 허용하고 예술적 장르를 다양하게 활용하여 예배의 대중화를 시도하는 그룹들이 있다. 이러한 동향과 시대적인 현실에 직면하여 많은 교회들이 예배를 바라보면서 과연 전통적 예배의 회복은 어느 만큼 필요한가 하는 것과 또 그것은 오늘날 어느 만큼의 가치와 한계를 가지고 있느냐에 대한 질문을 비롯하여 오늘의 우리에게 적절한 요소, 형식, 스타일을 갖춘 예배는 과연 무엇이냐 등에 대한 궁금증과 관심을 더해 가는 것 같다. 본고는 최근의 다양한 예배신학적 동향에 대해 특정의 경향에만 긍정하고 거기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가치중립적 입장에 서서 오히려 예배의 목적과 본질에 대한 이해를 정립하고 그 전범을 제시하는데 관심을 두었다. 이를 위하여 먼저 한국 예배의 현주소를 확인하고, 이어 특별히 성찬의 4중 행위에 대한 실제와 신학적 의미들을 탐구하면서 산발적이나마 한국교회 예배의 과거 혹은 현재의 모습들을 다루면서 그 바람직한 미래의 지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I. 세계교회와 한국교회예배의 현주소
A. 예배의 예전성(禮典性) 예배의 예전성 회복에 대한 관심은 최근 예배개혁에 관한 논의의 중심적 화두가 되고 있다. 구미 개신교회들에 비해서 한국교회가 예배개혁에 대한 필요의 인식과 그에 상응하는 반응이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그간의 개신교회의 모습에서 발견되는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한 비판적 인식에 기초하여 예배의 예전성(liturgicality) 회복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어 가고 있는 형편이다. 예전성은 예배의 의식적(儀式的) 측면과 깊이 관계되어 있다. 교회력에 따른 예배, 상징적 행위나 사물--건축물, 예복, 상징물 등을 포함해서--의 사용, 말씀과 성만찬의 연계성, 그리고 전통적 예배본문들에 대한 의존정도 등에 의해서 예전성의 정도가 가늠될 수 있을 것인데 그 중에서도 특히 말씀과 성만찬과의 관계는 논의의 핵이 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간에 한국교회는 전통적 개신교회의 특성상 말씀과 성만찬이 분리된 양태의 예배가 지배적이었다. 이로 인해 필연적으로 한국교회 예배의 예전성의 여지는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예전성의 결여는 곧 상징성의 황폐화와 연계되어 있다. 이 상징적 영역은 언어적 전달이 다 이룰 수 없는 심오한 단계의, 실재와 맞닿아 있는 영역을 차지한다. Paul Tillich는 현대 세계가 신학과 철학에 있어서 언어의 한계와 혼란에 직면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상징에 대한 역할의 강화로 이러한 한계가 극복될 수 있음을 시사하였다. 그의 지론에 의하면 상징이야말로 일상의 비상징적 언어가 다룰 수 없는 실재의 단계를 열어놓으며 인간의 종교적 영역을 움직일 수 있고 상징만이 궁극자(the Ultimate)를 나타낼 수 있다고 이해하였다. 그런데 Horton Davies는 이 상징과 성찬을 의미 있게 관련지었다. 즉, 그는 성찬을 기독교 신앙의 중심적 상징으로 보고 중시하였다. 중세의 성례전주의가 말씀의 부재로 인한 신앙의 왜곡을 초래한 반면, 개신교회는 이러한 상징의 힘이 약화되어 예배의 지성화라는 또 다른 역기능을 가져왔다. 복음이 전해지는 매개로서의 지적 호소가 필요한 것임은 분명하나 문제는 오늘의 교회들이 현실적으로 '말씀만'의 예배에 지나치게 경도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최소한의 감성적 인식의 영역인 시(視), 청(聽), 후(嗅), 미(味), 촉(觸)의 감각을 사용한 전인적 예배의 모습과 동떨어져 자칫하면 상당수 신자들이 지나친 지성화로 인해 예배로부터 소외될 가능성을 낳고 있다. 더 나아가서 '말씀'만의 예배는 오히려 말씀의 왜곡 가능성을 더 심화시켰다. 이는 설교자의 인간적, 또는 개인적 한계로 인한 부정적 역기능들도 함께 증폭시킨 것이다. Charles Rice는 '설교는 성찬에 의해서 규정되고, 그 범위가 정해지며 성만찬은 현장에서 구체화되는 본질적 복음'이라고 말한바 있다. 또 성찬 앞에서 설교하는 자는 그 성찬이 담고 있는 복음적 본질과 반하는 설교를 할 수 없게 된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예전성의 결여는 상징성의 황폐화를 가져오며 이것은 나아가서 전인적 신앙을 방해한다. 몸과 영혼,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 사이의 이원화, 그리고 그들 사이의 가치의 차이를 두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바탕과는 배치된다. 예배는 신체적 현실로부터 물러난, 단지 영적인 것을 다룸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되며 영혼과 몸을 포괄하는 전인적 예배를 지향해야 한다.
B. 예배의 신학적 바탕
한국교회의 예배의 갱신 논의 가운데 신학적 바탕의 건강성에 관한 지적이 적지 않게 있어 왔다. 이와 관련하여 아마도 '예배가 하나님이 베푸신 자리로서 그의 기선성(initiative) 혹은 주도권이 드러나고 있는가?' '하나님이 예배의 중심에 있는가?' 또 '예배에서 기독론적 전망은 견지되고 있는가?' 따라서 '예배가 구속사건을 균형 있게 드러내고 있는가?' 등의 질문들이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예배에서 하나님의 기선성은 예배의 성립의 기초를 이룬다. Robert Webber는 시내산에서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계약사건(출 19-24)을 예로 들면서 예배의 시작이 하나님의 소집에 의해서 비롯되었음(convoked)을 지적한다(출 19:1-6, 20). 인간 편에서 하나님을 찾거나 갈망하여 시작된 것이 아닌, 하나님이 먼저 부르심으로 예배 사건이 시작된다는 것으로서 계시적 신앙의 근간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예배는 인간의 고안이 아니며 인간이 그 시초를 연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여신, 약속이 있는 사건이다. 또한 예배는 인간이 자신들이 중심이 되어서, 자신들의 필요에 부응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부르는 자리가 아니다. 인간은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 불리어진 위치이다. 그러나 오늘날 종종 예배가 흔히 인간 편에서 그 바램의 성취를 위해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예배로 오해할 때가 많다. 하나님의 중심성에 대한 올바른 관점은 예배의 성격과 설교의 방향에 중요한 지침이 된다. 인간 편에서, 상황 편에서 복음을 해석하고 예배에서 그것을 구체화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편에서 현실을 바라보고 그것의 변화를 모색하는, 예배의 중심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중요하다. 다른 하나는 예배의 신학적 균형의 문제이다. 여기서 말하는 신학적 균형이란 구속사건에 대한 고른 반영이 이루어지고 있느냐의 문제이다. 오늘날 실상 많은 이름의 예배들이 특정의 목적을 위해, 특정한 측면에만 강조를 두어 진행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것이 현실적으로 기복성 집회로 자주 표출되고 있다. 넓은 의미에서 모든 신앙적 회합이 하나님을 향한 경배(worship)란 의미로서의 예배라고 지칭될 수 있을는지 모르나 보다 정당한 의미의 예배는 전체 공동체가 모인 가운데 예배 신학적 관점에서 기독교적 가치들이 균형 있게 고루 갖추어진, 정체성이 분명한 예배를 가리키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따라서 예배의 신학적 건강성을 지키는 한 방법으로서 기독론적 전망에 충실하고 있는지의 문제가 중요하게 취급될 수 있을 것이다. 예배는 초대교회로부터 예수의 부활 사건, 넓게는 일련의 구속사건 전체를 중요한 예배의 주제로 다루어 왔다. 이런 목적을 위해 교회는 초대교회 때부터 기독론적 주제를 담은 교회력을 사용하여 주기적으로 따라가면서 예배의 신학적 주제의 균형을 추구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대망--초림과 재림을 포함하는, 탄생, 세상에 드러내심, 고난, 죽으심, 부활, 교회의 성장 등이 그 내용이었다. 예배가 기독론적 초점과 전망을 갖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의 예배가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을 재연하는 체계적 틀과 배경을 가지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예배의 신학적 바탕은 곧 예배를 통해 존속되고 양육되는 신앙공동체의 건강성을 좌우하는 중요한 부분이 아닐 수 없다. 한국교회의 예배가 지금까지 과연 올바른 예배 신학적 기초 위에서, 또 그에 따른 끊임없는 검증에 의해 자정적 과정을 통해 시행되어 왔는지에 대해 질문한다면 그다지 긍정적인 답을 얻기가 어려우리라고 본다. 교회의 중심적 행위인 예배가 중요한 만큼 올바른 예배 신학적 바탕 또한 중요한 관건이 아닐 수 없다.
C. 예배 속에서의 회중(會衆)
예배 및 설교학자인 Charles Rice는 그의 책 Embodied Word에서 오늘날 예배를 위해 모인 회중(會衆, congregation)이 점차 단순히 청중(聽衆, audience)으로 전락해 가는 모습을 비판적으로 진단하고 있다. 청중(聽衆)이란 그야말로 '듣는 무리'를 말한다. 이 말은 라틴어의 '듣다'라는 의미의 audire에서 나온 반면 회중(會衆)이라는 말은 '모이다'를 뜻하는 gregare에서 나온 말이다. 그래서 이 말은 '함께'를 뜻하는 접두어 com(n)과 더불어 '함께 모인 무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예배에 참여하는 공동체는 개인의 참여나 결단과는 거리가 먼, 단순한 방관자와 같은 '듣는 무리'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함께 모여 예배의 공동집례자(co-celebrant)가 되어 하나님을 찬미하고 그 책임적 연대를 새롭게 해야하는 것이 예배다. 여기서의 진정한 청중은 바로 하나님일 뿐이다. 이런 관점에서 예배 공동체인 회중(會衆)의 두 가지 당위적 특징을 지적할 수 있다. 먼저 회중은 '함께' 하는 공동체라는 것이다. 오늘날 첨단정보화시대의 이기인 컴퓨터로 인해 많은 특혜를 누리고 살지만 동시에 사이버 공간에 형성되는 비 물리적 공간을 통한 커뮤니케이션이나 그 유용성에 대한 과신으로 인해 인간의 만남이 온전하여지지 못하고 더불어 서로에 대한 연대와 책임을 상실해 갈 위협에 직면하고 있다. 아직 한국교회에 이런 움직임이 미미하지만 마치 현재의 예배가 미래에는 사이버 예배로 대체(代替)할 수 있는 양 기대하는 목소리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이것은 결국 예배를 통해 일어나야 할 전인적 헌신과 성도간의 수평적 연대 및 책임을 깨뜨리는 위험한 가정이 될 것이다. 시대와 문명이 아무리 변하여도 기독교 신앙공동체의 예배는 신체적 참여(physical presence)가 동반되는 '함께 모이는' 자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함께 함을 통해서 서로에 대한 공동적 관심(common concerns)을 나누는 일은 기독교 예배의 중요한 바탕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곧 대 사회적 봉사의 영역에 대해서도 무관심할 수 없는 교회의 자세를 예배가 드러내 주고 있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회중은 예배의 능동적 참여자라는 것이다. 앞서 예시한 예배신학자인 Robert Webber가 관찰한 성서상의 예배는 모든 참여자가 능동적이었다는 것이다. 즉, 모세에게 지도력이 부여되었는가 하면, 아론, 나답, 아비후, 칠십 장로, 그리고 청년들에게 나머지 다른 역할들이 주어졌으며 각자 주어진 역할들을 수행함으로써 수동적인 관객이 아닌 능동적 참여자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장면은 지도자와 청중(audience)의 관계가 아니라 모두가 회중(congregation)의 일부로서 각자 자기에게 주어진 일들을 수행하는 조화로운 참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출 24:1, 5).그러나 오늘날 개신교회의 말씀중심의 예배는 자칫하면 설교자의 부각과 함께 회중의 주변화 및 무관심을 야기 시킬 수 있는 구조를 띄고 있다. Craig Erickson은 수동적 예배는 흔히 빠지기 쉬운 함정이라고 지적한 뒤 활동적 예배의 형태가 되려면 신자들의 참여가 충분하고도 의식될만한 수준에 이르게 하며 또 그것을 고무시키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예전적인 예배에서 흔히 등장하는 환호사(acclamations)--사람들이 예배 중에 응답의 방법으로 외치는 고정형식, 응답, 시편가의 교송, 상징들의 사용, 교창(antiphone), 교회력에 따른 색깔(colors)의 사용, 제스쳐, 행동, 침묵 등을 사용하는 것이 적극적 참여를 유도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종교개혁이후 예배의 순서들이 비교적 많이 일반 신자들에게 위임되고 있지만 여전히 오늘의 우리의 예배는 회중이 참여자로서 관여하는 예배 양태이기보다는 설교자와 사회자 및 성가대 등에게 대체적으로 집례가 국한되어 있고 대부분의 신자들은 그야말로 수동적인 상태로 남아 있게 되는 경우가 많다. 초대교회 예배에서의 신자들의 역할은 예배의 유효성을 결정하는 파트너였다. Justine Martyr가 소개한 예식에 보면, 집례자가 재량껏 성만찬기도를 마치고 나면 사람들의 아멘으로 답하는 부분이 나오는데 이것을 Bard Thompson은 회중이 아멘이라는 응답을 통해서 기도를 승인하는 것으로 보았다.회중은 개인적인 관심에만 묶여있는 사람들의 무리가 아니라 서로 서로에 대해서 책임적인 연대감을 나누어야 하는 무리인 것이다. 예배는 바로 이러한 성격을 지닌 회중의 참여에 의해서 드려지는 공동의 행사인 것이다. 이에 참여하는 각 개인들은 결코 수동적인 관망자가 아닌 예배의 성립을 가능케 하는 참여자로 인식되어야 할 것이다.
II. 성찬의 4중 행위와 예배의 본질
한국교회의 예배의 현황에 대한 비평적 지적과 더불어 상응하는 대안들은 다양하게 제시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그러한 주제들에 대해 성찬, 그 중에서도 특히 4중 행위에 대한 탐구를 통해서 대안들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성만찬의 사중행위는 개신교 성찬에서 오랫동안 구체적 형태로 지켜져 왔던 것은 아니었다. 공관복음서(막 14:22-26; 마 26:26-30; 눅 22:14-22)와 바울 서신(고전 11장 23-26)에 나타난 제정기사는 비록 각각의 순서가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4가지 핵심적 행위를 묘사하고 있다. 그 내용은 떡을 취하고(take), 축사한 뒤(bless), 떼어(break), 주는(give) 행위이다. 이 네 가지 행위는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기독교 예배 역사 안에서 봉헌예식(Offertory), 성찬기도(Eucharistic Prayer), 분병(Fraction), 수찬(Communion) 등의 네 가지 성만찬의 장으로 발전하였다. 이들은 상호 보완적이며 깊이 연관되어 있어서 전체적으로 예배의 정신을 통전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이들 각각의 내용과 의미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오늘의 예배가 추구하는 갱신의 방향에 중요한 자료들을 제공할 수 있다고 본다. 이들은 전통적인 예배문서들과 현대의 주요 개신교 교단들의 성만찬 예식문 속에서 발견이 되는데 그에 대한 검토는 예배에 대한 개신교적 이해들을 통시적으로 검토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다.
A. 성물의 봉헌 - 떡과 포도주를 취함보통 설교부분이 끝나고 성찬이 시작되면서(성찬이 시행되는 경우를 전제하여) 첫 번째 행위는 떡과 포도주를 취하는(take) 일이다. 이 부분은 바로 집례자가 회중으로부터 성찬예식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봉헌물을 받는 순서이다. 바람직한 경우는 아니나 과거에는 성물(elements)들이 예식이 시작되기 전에 미리 성찬상에 배열되어 있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 경우에는 덮고 있던 성찬보를 조심스럽게 걷는 것이 성물을 들고 제단 앞으로 행진하여 나아가는 일을 대신하였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문서들에는 회중의 무리가 집례자에게 성물을 가져다 드리는 일종의 봉헌(Offertory)절차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오늘날의 교회들도 상당수 이와 같이 성물을 헌금과 함께 헌금위원이나 성물운반자들을 통해 단까지 행진하여 나가 드리도록 한 뒤 이어서 집례자가 성물과 헌금을 분리하여 성물은 성찬상에, 그리고 헌금은 따로 놓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이 행위가 있는 시점에서 집례자가 드리는 봉헌기도는 성만찬의 첫 단계의 성격을 잘 반영하고 있다. 성공회의 Book of Common Prayer의 79년 판에 따르면, "우리가 가져온 일상적인 것을 받으시고 신성한 은총의 선하심으로 우리에게 가져온 그 이상으로 갚아주시기를" 기도한다. 그래서 "우리 가운데 오려서 우리와 함께 일하시는 그리스도를 앎으로써 강건해 지기를" 기도한다. 또한 여기서 드려지는 성물의 내용에 관하여 Justine Martyr의 제 1 변증론에 보면, 오늘의 관행과 비교해서 볼 때 색다른 부분이 있음을 확인케 된다. 성만찬 성물과는 구별해서 드리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예배 안에서 고아, 과부, 몸이 아프거나 어떤 이유로 인해 궁핍한 자, 그리고 나그네들을 위해서 따로 헌금을 하였고 이것을 회중의 의장--당시로는 성직자--은 그들을 돌보기 위해 이것들을 관리하였다. 그러나 성만찬의 봉헌행위(take) 중에 아예 직접적으로 성물 이외의 요소들을 드렸던 한 사례를 5, 6세기 비잔틴 예식에서 발견하게 된다. 여기에 바쳐진 봉헌물들의 일부는 성물로 사용키 위해, 일부는 성직자의 생활비를, 그리고 일부는 가난한 자를 위한 구제물을 위해 함께 드려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성만찬의 첫 번째 행위에서 오늘을 위한 몇 가지 중요한 의미들을 발견하게 된다.첫째는, 회중이 그들의 땀과 수고를 드려 생산한 수확물을 하나님께 직접 드리는 일이 상징적 행위인 성물운반 및 행진을 통해서 실행되는 것이 고전적인 모범이라는 점이다. 예배는 인간이 자신들의 노력과 삶을 투자하여 획득한 것의 일부를 하나님께 드려서 인간의 소유 전체가 다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물론 여기서 사람들이 드리는 소재의 근원은 먼저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이다. 이 사실을 봉헌기도의 내용이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하나님과 인간의 상호 나눔이 하나님의 주도하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가시적인, 혹은 불가시적인 모든 것의 주도권을 가지시고 예배를 통해 인간과 대화를 나누시는 것이다. 둘째, 여기서 드려지는 산물은 특정지역, 특정 예배자들에 따라 다른 것들이 될 수 있다. 그것들은 자신들이 속한 삶의 터전에서 산출된 것들이기에 그렇다. 이것은 곧 개개 지역교회들의 문화적인 환경과 삶에 대해 예배는 다양성에 대한 포용적 입장을 지닐 필요를 시사한다. 오늘날 예배의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 문화의 옷을 입는 일에 대해 많은 공감이 확산되고 있다. 자신들이 속한 문화권에서 나온 상징물들--한국의 경우로 예를 들자면, 밀로 만든 빵 대신에 쌀로 만든 떡--은 그들의 신학과 예배의 독자성을 위해서도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다양성이 필연적인 지구촌 각 교회 공동체들이 각자 자신의 문화의 결과들에 대한 긍정이 없이는 자신에 대한 정체도 잃어버리기 쉽거니와 나 아닌 남을 향한 끝없는 종속성의 틀을 벗어날 수밖에 없다. 셋째는 봉헌물의 종류는 예배가 사회적 영역을 포함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앞서 소개한 동방정교회에서는 오늘날로 말하자면 금전적 의미의 헌금과 기타 구제를 위한 물품이 성물과 함께 드려지고 있다. 초대교회 때부터 이웃에 대해 관심은 교회의 선교의 중요한 부분이었음을 보여준다. 부유한 자는 예배처소에 물건을 선물로 가져와 예배 목적을 위한 성물과 성직자의 삶에 필요한 것을 드릴뿐만이 아니라 가난한 이웃의 생활을 지원하였다.
B. 성찬기도 - 감사를 드림 드려진 성물을 놓고 하나님을 향하여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두 번째 행위는 오랫동안 성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의 하나로 인식되었다. 왜냐하면 이 단계에서 그리스도의 실제적 임재(real presence)가 일어난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 또 개신교 내 여러 진영들 간의 분열의 중심 축에는, 이곳에서 일어나는 그리스도의 임재양식에 대한 해석의 차이가 중요한 원인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이 부분은 전체적으로 집례자가 행하는 기도로서 그 내용을 보면 하나님의 위대한 행적에 대한 찬미,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에 대한 기념, 성령의 초빙(Epiclesis)을 위한 기도, 영광송(doxology) 등이 포함되나 히브리적 전통(시편 148편)에서 발견되는 기도의 스타일로서 제정사(the words of institution)와 같은 내레이션이 삽입되고 있다. 흔히 이 부분은 초대교회의 성만찬의 명칭이 '감사'라는 의미의 헬라어, eucharistia에서 온 것임을 강조하면서 대감사(the Great Thanksgiving)라는 명칭으로 많이 불리어지고 있다.기도를 드리는 몸자세 역시 성만찬 신학의 의미들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검토자료이다. 중세기에는 이 성만찬 기도 시 사제는 제단이 놓인 동쪽 벽을 향한 채 회중에게는 등을 돌리고 행하였다. 성만찬의 성격을 희생제사로 부각시켰던 시대상황에서 사제는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을 향해 선 일종의 제주(祭主)로서의 역할이 강조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개신교의 성찬은 더 이상 희생제사--그리스도의 실제 몸과 피로 변한 것을 쪼개고, 부어 제물로 바치는--의 의미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부활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식사요 잔치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에 회중을 바라보면 서는 것이 일반적이다. 집례자는 잔치를 여신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거기에 서있는 것이다. 지상의 그 어떤 주최인도 식탁에서 벽을 향한 채 손님과는 등을 돌리고 식사를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집례자의 이런 자세는 그의 이중적 대표성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사람들에게는 참된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대표하며 동시에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을 대표한다. 또 일부 어떤 전통에서 참회나 겸손을 표상하여 집례자가 무릎을 꿇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오늘날 대체적으로는 유대인과 초대기독교인들이 하던 관습대로, 또 디모데 전서 2장 8절에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라는 말과 같이 서서 기도한다. 이 기도 중에 회중은 고개를 숙이거나 눈을 감기보다는 집례자의 기도와 몸짓에 주목하며 참여한다. 이러한 자세들은 집례자와의 일치감 속에서 기도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기쁨과 감사를 내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여기서 성령초빙(Epiklesis)은 과거와 같이 떡과 포도주의 성변화(consecration)를 위한 것이기보다는 '회중을 위해 그리스도의 몸이 되게 해달라' 혹은 '성령이 회중에게 임하시어 그들을 변화시키시기'를 구하는 기도가 드려진다. 성만찬의 두 번째 행위인 대감사기도 안에서도 역시 오늘의 예배신학적 지침들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는, 대감사기도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위대한 행위에 대한 내레이션이 담겨져 있다는 것이다. 먼저 성부 하나님의 창조하심과 섭리, 성자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 성령 하나님의 내재적인 역사 등이 칭송될 뿐만 아니라 그 모든 것이 오늘에도 현재화되기를 기도하고 있다. 예배는 시대와 상황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항구적으로 이 사실이 늘 회상되어야 함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위대한 행적과 그의 현재적인 역사를 반복적으로 재연하는 것은 곧 기독교 신앙의 건강한 형성을 위한 중요한 밑거름이며, 동시에 회중의 변화를 이끌어 내는 힘이 되고 있다. 둘째는, 예배 안에서 내재적인 성령의 역사가 긍정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부분에 따르면 성령은 곧 가장 중요한 사건의 주체로 기능하고 있다. 예배 안에서 초자연적이고 주체적인 성령의 역사에 대한 개방된 태도가 깃들어 있다는 것이다. 다만 오늘의 개신교회의 성만찬 기도는 성변화의 대상을 성물로 보지 않고 회중에게 두고 있다는 변화가 목도된다. 과거 중세기와 오늘날의 일부 전통에서는 여전히 변화의 대상이 떡과 포도주에 국한되어 있다. 그러나 정작 현대 예전의 모범이랄 수 있는 3세기초의 사도전승(Apostolic Tradition)의 성령초빙기도에도 그 대상이 회중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셋째는, 회중이 능동적 참여자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집례자는 과거와 달리 회중을 향하여 선다. 이것은 곧 회중이 예배의 참여자로 포괄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집례자가 홀로 주관하는 제사적 예배에 수동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참여자로서 하나님이 베푸신 잔치에 참여하는 자들이다. 오늘날 예배 안에서 신자들이 구체적 순서에 참여하는 추세가 증가되고 있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그 외에도 성만찬은 감사를 드리는 장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예수께서 떡을 떼시며 감사했던 것처럼 집례자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감사(thanksgiving, eucharistia)를 드리는 것이지 결코 제사를 준비하는 사전적 절차가 아니다. 예배 또한 감사를 드리는 사건이지 우리의 공로를 하나님께 드리는 장이 아닌 것을 시사한다.
C. 분병 - 떡을 뗌 이 행위는 대감사기도가 끝난 후, 떡을 떼는 순서이다. 소위 분병(Fraction, 聖體分割)이다. 떡은 상징적 행위로 한번만 떼며 회중들이 충분히 관찰할 수 있도록 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예식서들을 보면 이 부분에 그 의미를 반영하는 한 개 이상의 적절한 구절들을 삽입하고 있다. 예를 들어서 미국 장로교회의 Book of Common Worship에서는 바울의 고전 10장 16-17의 말이 인용되는데 집례자는 사람들 앞에 떼지 않은 떡을 보여주며 말하기를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라고 한 뒤 떡을 떼고 이어서 말한다.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떡은 그런 다음 성찬상에 놓여지고 주전자로부터 포도주를 잔에 채운 다음 그것을 회중들 앞에서 들면서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냐?"라고 한다. 이어서 떡과 잔을 들은 채 초청의 말을 잇는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하나님의 선물이라"라고 말한다. 여기서의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희생을 보여준다. Thomas Oden은 이 분병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부서지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만이 아니다. 그의 심장, 곧 모든 인간의 고뇌 속에 상징적 으로 참여하는 그의 심장이다. 떡과 포도주는 상징적으로 전체 그리스도(그의 몸과 영 혼)을 상징한다. 고대사회의 생리학에서는 피는 탁월한 생명의 상징이었다. 유대인들의 제사에서 피를 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었다...하나님은 우리의 양식이 되셨다. 이러한 부서짐이 없이는 어떠한 영적인 양육(nurture)이나 먹임(feeding)이 가능치 않다. 그렇기 때문에 집례자는 예식에서 물리적으로 눈에 보이게 사람들 앞에서 이 떡을 부수는 일이 필요하다.이러한 견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성찬이 전하는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하지만 이런 의미가 한편으로는 너무 지나치게 강조되어 중세는 물론이고 개신교회 안에서도 여러 세기를 거쳐오는 동안 성찬의 전체 의식이 대체로 이 '떡을 뗌(the breaking of bread)'의 단계에 지나치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즉,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한 정서를 너무 지배적으로 반영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종종 비판되듯 성찬이 장례식 분위기를 연상시킨다는 힐난을 받아 왔다. 이 정서는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성찬식이 귀결해야 하는 지배적 정서는 아니라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떡을 떼는 행위 속에서 나타나는 오늘의 예배 신학적 지침들은 어떤 것들인가? 첫째로 생각해야 할 것은, 분병은 곧 그리스도의 희생의 사건이요, 자기를 내어줌의 사건이다. 유대적 전통에서는 희생은 곧 피흘림을 수반하였다. 비록 동물을 잡아서 드리는 희생제물이 오늘의 우리에게는 혐오스러우나 희생제물을 가져온 사람은 그것을 통해 자신의 희생을 은유하였다. 회개와 화해의 가시적 표시로서 하나님께 가치 있는 어떤 것을 드림으로써 자신을 줌을 상징한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이 죽는 것이며 속죄를 이루는 것이며 화해를 성취하는 것이다. 분병에 참여함으로써 신자들은 자신을 위해 대신 죽은 그리스도의 희생에 참여한다. 이것은 곧 슬픔의 자리요 참회의 자리이다. 간혹 성만찬을 단순히 축제적 분위기로만 이해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는데 만일 이 분병, 곧 그리스도의 희생이라는 정서를 먼저 거치지 않는 축제성은 무의미하다. 이러한 정서는 예배에서 반드시 반영되어야 할 부분이다. 미국장로교회는 칼빈의 전통을 이어서 고백과 용서(confession and pardon)의 항목을 예배의 초두에 두고 있다. 또 미국 루터교회는 입례송이 있기 전에 고백과 용서(confession and forgiveness)의 의식을 선행하고 있다. 둘째로 생각해야 할 것은 오늘날 이 부분에 대한 신학적 이해가 과도하게 무시되려는 경향이 있다. 부활의 기쁨에 앞서서 고난에 참여하는 과정이 있다는 점이 무시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것은 곧 예전적 교회들의 예전갱신운동과 개신교회의 갱신운동을 구분하지 못한 데서 오는 오류이다. 개신교에서의 예배정서에 비해 로마 가톨릭 교회는 오랜 전통을 지내오면서 미사의 중심이 희생제사였기에 미사 전체가 장례식 분위기(funeral mood)에 지나치게 경도 되어 있다는 자체적 비판이 있어 왔다. 그러나 개신교회의 예배 분위기는 대체로 축제적 성격을 견지하는 편이다. 성찬식도 전체적으로는 이런 분위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 무거운 분위기의 찬송가가 선택될지라도 축제성의 회복을 강조하리만큼 장례식 분위기는 아니다. 아울러 셋째로, 이 분병은 그리스도의 희생에 신자들이 동참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스도를 따름에는 고난의 과정을 함축하고 있다. 그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일은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 예배는 위로와 환희뿐만이 아닌 십자가의 삶에 대한 다짐과 실천을 요청하는 자리임을 보여주고 있다.
D. 수찬 - 떡과 포도주를 나눔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주고 받는 수찬은 바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을 이루는 극적인 순간이다. 중세교회는 여기서 받게 되는 성물은 그리스도의 진정한 살이며 피라는 것을 굳게 믿었다. 그 결과 성만찬 신학의 초점이 대상화되는 문제를 낳았다. 그러나 개신교의 성만찬 신학은 앞서서 지적한 대로 성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 않음이 분명하다. 오히려 성만찬 행위에 참여하는 회중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떡과 포도주를 받는 무리들은 여기서 다시금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리라'고 약속하신 그리스도의 진정한 임재를 맛보며 그와 더불어, 또 사람들과 교제(communion)를 나누게 된다. 이 수찬은 또한 세상의 끝 날을 지시한다. 그 날은 영화(榮華)된 주와 함께 인간역사의 완성된 모습을 나누게 되는 때이다. 그것이 성찬 속에서 이미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BEM 문서는 성만찬은 약속되어진 대로 하나님이 온전히 통치하시는 모습을 열어 놓으며 그것은 창조가 궁극적 갱신에 이르는 미래임을 시사하고 있다. 이것은 곧 하나님 나라의 도래이다. 성만찬은 이런 상징들--창조의 궁극적 갱신--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며 또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오심을 기쁘게 경축하며 기다리는 잔치'라고 표현하였다. 미연합감리교회의 Book of Worship에는 수찬을 마친 후 파송 하기에 앞서 '영원하신 하나님이시여, 당신이 우리를 위해 자신을 주신 이 거룩한 신비에 대해 우리가 감사하나이다. 성령의 권능으로 그 나라에 들어가게 하옵시고 우리 자신들을 다른 사람을 위해 드리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며 마감한다. 그 나라에 들어감을 간절히 간구하고 있다. 성만찬의 참여는 곧 이와 같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물씬 담고 있다. 교단 및 교파별로 다양한 모습을 띄고 있는 수찬의 양태 속에도 중요한 성만찬 신학들이 내재하여 있다. 예를 들어 침례교, 장로교, 제자교회 등은 의자에 앉은 채 배찬을 담당한 평신도들에 의해서 각자에게 분배해주며 한국의 대부분 개신교회들도 이 방식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공회, 루터교회, 감리교회들은 단(檀)에 설치된 난간(communion rail)으로 나아가서 계단에 무릎을 꾼 채 떡과 포도주를 받는다. 이들 중에서 어떤 교회들은 제 2차 바디칸 이후의 자세, 즉 서서 받는 자세를 취한다. 어느 곳에서는 무릎 꿇는 계단을 없앴다. 어떤 예에서는 예배자들은 서서 떡을 받은 다음 기도를 위해 난간에 무릎을 꿇도록 하는 선택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오늘날 대체적으로 많은 교회들이 성만찬 신학의 갱신을 통해 서서 떡을 받도록 하는 추세이다. 떡과 포도주를 받는 것은 부활의 주와 깊이 만남을 상징하며 일종의 미래를 향한 희망을 나타낸다. 성찬은 참회의 예식으로 끝나지 않고 감사와 소망으로 맺는 예식이다.수찬은 예배의 절정을 시사한다. 여기에는 중요한 예배 신학적 의미들이 담겨져 있다. 첫째는, 수찬은 곧 부활에 동참하는 자리이다. 그러므로 성만찬, 더 나아가서 예배 또한 부활의 주를 경축하는 중요한 장으로 귀결되어야 한다. 원시교회 때부터 안식 후 첫날인 제 8일, 곧 주일은 곧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축하는 날이었다. 사순절 기간 속에 들어있는 6개의 주일마저도 원칙적으로는 사순절의 분위기에 종속되지 않고 여전히 부활을 경축하는 시기로 보았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은 십자가 없는 부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앞서 살펴본 대로 수찬에서 상징되는 부활의 경축과 참여는 분병의 정서가 전제되어야 함은 두말할 나위 없다.둘째로, 수찬은 미래의 하나님나라를 가리켜 준다.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에서 부활의 주와 더불어 나누게 되는 온전한 축제의 식사를 지시한다. 이러한 성만찬의 의미는 예배의 지향점을 드러내고 있다. 예배는 곧 현재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곳이면서도 동시에 여전히 완성을 대망하는 이중적 지향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의 잔치로 만족할 수 없는 것이며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더불어 있게 되는 혼인잔치와 잇대어 있는 소망의 잔치이다. 예배는 이와 같이 현실에 안주하도록 하지 않고 미래의 완성된 현실을 향해 나아가도록 격려하여야 한다.
III. 실제적 적용의 방법과 그 지향
전통적인 성찬예전에 대한 바른 이해와 실행은 예배의 정신을 지켜 나가는 중요한 근간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단순히 간결하게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것으로 성찬예배의 목적이 올바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성찬식은 앞서 논의한 대로 그 속에 담겨진 축적된 내용들이 상징적 행위와 사물을 통해서 얼마나 구현되느냐의 여부에 성패가 달려있다. 따라서 예배의 근간을 이루는 중요한 내용들이 담겨져 있는 성만찬의 4중 행위는 성찬의 비중의 회복과 더불어 더욱 중요한 고려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이 4중 행위에서 나타난 예배의 정신은 그 적용의 과정에서 과연 어떤 실제적 문제들을 지니고 있으며 적용상의 어떤 방법적 혜안(慧眼)들이 요청되고 있는가?
A. 전통과 동시대적 요청전통과 동시대적 요청은 기독교 예배가 끊임없는 긴장을 가지고 견지해야 할 중요한 두 기둥이라고 볼 수 있다. 전통은 곧 시대와 상황과 문화를 뛰어 넘어서 기독교의 본질적 메시지가 적용되면서 나타난 구체적 해석의 역사라고도 볼 수 있다. 그것은 곧 오늘 우리의 신학적 전개를 위한 좋은 거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예배와 관련해서 전통의 의미는 남다를 수밖에 없다. 성서는 복음에 대한 신학적 진술을 기초로 하여 쓰여진 것이기에 예전적 내용이나 체계에 대한 자료들은 오히려 후대의 교회의 전통 속에 보존된 본문들에 의해서 더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 말은 성서 속에 나오는 예배의 단편적 기술들이 후대의 발전적 형태의 예배들과 본질적으로 상이한 점들을 갖고 있다거나 결여된 부분이 있다거나 하는 말이 아니라 복음과 신앙을 표현하는 방식이 시대가 지나가면서 당대의 상황적 요청에 부응하여 발전적 형태로 자리잡아가고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것은 동시에 예배의 형태가 선험적 형태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아니므로 동시대적 상황에 따라 그 표현방식의 변용이 필요할 수 있음을 시사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시켜서 Baumstark의 말에 따르면 오래된 본문일수록 성서의 표현을 덜 직접적으로 담고 있다고 한다. 즉, 성서적 정신을 담고는 있지만 문자적으로 본문을 담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반면 이후의 것일수록 더욱 분명하게 교리적으로, 신학적으로 잘 정리된 것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성찬의 전통은 오랜 역사를 통해서 다양한 상황과 처지에서 복음의 본질을 담기 위한 고투 속에 피어난 발전적 결정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동서방을 막론하고 심지어 같은 서방 안에서의 여러 가지 예전들이 존재하지만 그들 예전의 틀은 비록 성찬신학의 차이가 있고 그 내용들의 첨삭 및 순서의 바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실제적 실행의 모습은 놀랍도록 본질적 일치를 이루고 특정한 목적을 지향하고 있다는 사실은 전통에 대한 신뢰를 한층 높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먼저 성만찬의 전통적인 형식과 의미에 대한 바른 회복이 필요하다. 오늘날 일부 개신교회에서 시행하는 대로 전통적 예문은 배제되어 있거나 거리가 먼, 성만찬의 실행은 사실상 큰 의미가 없다. 오히려 그것은 중세적 성례전주의의 다른 얼굴이 될 수 있다. 떡과 포도주를 받아먹고 마시는 그 자체에 성찬의 의미를 두는 것은 곧 성물에 대한 마술적 효험을 기대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이것은 상징적 행위와 더불어 복음을 수용하는 사건이다. 따라서 오늘과 같은 상황에서 성만찬을 매주 시행해야만 된다든지, 성만찬이 설교보다 더 중시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논의의 본질적 핵심은 아니다. 전통의 복원과 관련해서 또 한가지 고려할 수 있는 것은 오늘날에 이 성찬을 구현하는 방식으로서 창의성의 범위는 어느 정도가 되어야 할 것인가? 목회자나 신학자가 성찬을 시행함에 있어서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언어를 채택하고 사용하는 일이나 혹은 그의 개인적인 문학적 창의성을 사용하여 성례전적 행위의 내용을 독립적으로 바꾸는 일은 매우 신중성이 요구되는 일이다. 개인적인 창의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전통의 복원이라는 점을 지적한 것이라고 판단된다. 다만 사용되는 언어의 동시대성, 기도의 목표가 되는 동시대적 주제들의 적절성, 풍성한 정보에 노출된 오늘의 시대적 상황에 맞는 간결성, 변화된 상징체계 등을 현실화하는 것이 중요한 관건이라고 여겨진다.
B. 사중행위의 의미와 적용성만찬의 4중 행위는 예배가 지향해야 하는 정신들을 골고루 반영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이것들은 그 가운데서 어느 특정의 행위나 그 의미만이 강조되거나 또는 역으로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 이들은 예배의 정신에 고르게 반영되어야 하는 통전적 일부이다. 먼저 성물의 봉헌은 곧 인간이 하나님께 헌신하는 부분이다. 우리는 성찬에 임하면서 먼저 우리가 하나님 앞에 헌신을 드리고 그에게로 나아감을 필요로 한다. 인간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곧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헌신의 산물은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예배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대화이지만 동시에 그 대화의 이니셔티브는 하나님께 있음을 잊으면 안 된다. 예배의 정신의 근본적 배경에는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주도적인 도움이 있다. 오늘날 에큐메니칼 형태의 예배순서를 크게 네 개의 장, 도입(entrance) 혹은 모임(gathering)--예배를 준비하는 부분, 말씀(word)--성경봉독과 설교가 중심, 성찬(table)--세례가 있을 때는 세례를 포함하는 성례전 부분, 파송(sending forth)--예배자들을 세상으로 다시 보내는 장--으로 구분할 때, 그 첫 장에 해당되는 도입, 혹은 모임 부분에 모두 '예배에의 부름'--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을 예배로 부르심--이라는 순서가 첫 요소, 혹은 중심요소로 들어가 있다. 하나님이 예배를 여신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부분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없으면 예배에서 하나님의 주도권을 경시하고 인간의 가치를 강조하게 된다. 예배는 인간이 지니는 한계에 대한 인식을 기초로 한다. 다음으로 성찬기도는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드리는 감사이며 하나님이 그곳에 모인 자들을 위해 축복하시기를 간구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창조와 섭리를 행하시는 성부 하나님, 구속의 역사를 이루신 성자 하나님, 그 완성을 오늘의 현실에 구현하시는 성령 하나님이 이 기도문 속에 들어 있다. 여기에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각 위의 역할이 분담된 가운데 그 역사가 골고루 표현되고 있다. 이것은 곧 예배의 대상은 바로 삼위적(Trinitarian)이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 예배는 기독론적 전망을 견지하되 삼위일체가 예배의 대상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또한 성찬기도를 통한 축복의 수혜자는 대상물이 아닌, 모인 무리이다. 과거 성찬기도는 그 핵심이 성물의 성변화(consecration)에 국한되어 결과적으로 여러 모순을 남겼다. 그러나 개신교회의 성찬기도는 삼위 하나님에 대한 찬미의 내레이션과 함께 그곳에 모인 자들의 변화를 통한 온전한 교제(communion)를 지향한다. 세 번째 행위인 분병은 곧 죽음과 희생의 사건에 대한 기념의 측면이 강하다. 이미 복음서와 바울 서신에서 나온 대로 제정사는 곧 예수의 '죽음의 기념'이었다. 그러나 또한 부활 후의 성찬은 부활의 기쁨을 나누는 것이었다. 이 둘은 균형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전자는 지난 서방교회의 역사 속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입장이었다. 화체화된 예수의 죽음 사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기에 예배 자체가 장황하고 어둡고 음울한 분위기가 지배했다. 성만찬의 4중 행위 중, 이 부분에 특별한 강조가 있었던 셈이다. 이 부분이 분명 예배의 주요한 요소를 이루고 있음에는 이의의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오늘에 와서 성만찬은, 혹은 넓게 말해서 예배는 기쁨과 축제의 잔치였다고 만 주장하는 것은 균형을 잃은 견해가 될 수 있다. 이 부분은 결코 기쁨의 축제로서의 예배라는 이름으로 무시되거나 약화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다만 이 부분이 또 예배의 전형적 의미인양 강조되어서도 안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수찬은 곧 그리스도의 부활에의 참여를 의미한다. 이 부분은 분명 오늘날 기쁨을 잃어버린 예배, 축제성을 상실한 예배 등에 도전을 가하는 예배의 측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부분만이 지배적인 예배의 정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예배가 부활의 잔치로서 일찍부터 자리잡았지만 그 부활의 축제성은 종결로서 주어지는 것이지 그리스도의 몸의 고난도 전제되지 않은 예배의 분위기가 시종을 지배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무가치성과 죄성의 극복을 위한 준비적 자세를 불필요하게 만들 수 있다. 이 네 가지는 모두 다 중요한 것으로서 그 중의 하나만 강조되고 다른 것이 배제되면 안될 것이다. 오늘날의 예배와 성찬은 이 네 가지의 고른 균형 속에서 특정 주제에 편중되지 않는 가운데 시행될 때, 예배의 목적을 올바로 구현할 수 있을 것이다. 성찬은 준비하고 희생의 과정을 거친 뒤, 축제적 분위기로 나아가는 일이 필요하다.
C. 본문과 상황의 관계 전통적 성만찬에 관한 내용과 형식에 대한 존중의 필요에 대해서는 이미 충분한 논의가 된 것으로 본다. 그런데 이것을 개인이 속한 각각의 문화 속에서 실제 시행하는 과정에서는 필연적으로 문화적인 차이가 뒤따를 것이 분명하다. 예를 들어서 성만찬 성물인 빵과 포도주는 유대적 농목축 환경에서 나온 산물이었다. 이것들을 사용하는 것은 비교적 오랜 역사를 통해서 정통교회의 관례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 지구촌 어느 환경과 사회에서나 이견이 없는 공통된 상징성을 갖게 할 것인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밀이 유대인들의 주식이었던 만큼 한국인에게는, 더 나아가서는 아시아 여러 나라에는 쌀이 주식이 되어왔기 때문이다. 더욱이 북극의 에스키모에게 밀이든 쌀이든 모두가 철저히 그들의 삶과는 무관한 것들이었다. 여기에서 문화적인 변용의 문제가 생겨나게 된다. 오늘날 개신교 예배학자들 가운데 성물에 대해 너무 가벼운 것을 사용하는 것은 적절치 않음을 지적하고 있다. 현실성과 위엄을 동시에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정의 식탁에서 나눌 수 있는 것이 가장 좋다고 본다. 일반식사와는 거리가 먼 어떤 것을 성찬 상에서 먹으라고 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예수께서 사용하지 않은 어떤 것을 채용하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말한다. 즉, 일반인들의 식사에 가까운 것의 사용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선교초기부터 문화적인 변용을 위한 노력에 대해 소극적인 입장인 편이다. 성만찬의 빵으로 사용되어온 자료(속칭, 카스테라)는 지금 구미에서도 낯선 것으로 기독교 예배전통을 따른 것도 아니거니와 우리에게도 실상은 낯선 것이었다. 우리 문화 안에서 오랜 역사를 통해 잔치의 음식이며 의식(儀式)의 매개였던 떡도 아닌 것으로서 성만찬신학의 관점에서 볼 때도, 조심스럽고 경건하게 취급되기 어려운 형태를 띄고 있다. 한 가지 더 부연하자면, 우리가 사용하는 찬송가도 마찬가지다. 한국선교 2세기에 접어든지 오래지만 찬송가의 대다수가 외국 곡조에, 외국가사로 된 것을 번역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세계교회와 동일한 곡조와 내용의 찬송가를 부른다는 것도 교회일치의 차원에서 나름대로 의미가 있지만 우리에게 친숙하고 우리의 정서를 반영하는 곡조가 희소하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예배의 문화적 변용의 문제는 우리 신학의 세계신학에 대한 독자성을 확보하고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자긍심을 높이고 회복할 수 있으며 예배의 효율을 높이는 방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예배의 중심적 상징행위인 성찬은, 그 중요성을 감안해 볼 때 상응하는 적절한 문화적 변용을 필요로 하는 부분이라고 본다. 나가는 말오늘날 예배의 개혁에 대한 움직임 가운데 예전성의 회복을 통한 개혁의 필요를 주장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와 관련해서 예배에서 성찬의 비중과 가치에 대한 긍정적 평가도 함께 확대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평가의 근저에는 성찬의 단순한 행위보다도 그 행위가 동반하는 예배 신학적 가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성찬과 관련된 해묵은 교리적 논쟁에 대한 또 하나의 주장이 아닌, 그 속에 녹아 있는 오늘을 향한 예배의 소중한 원리와 내용에 대한 재발견을 염두에 둔 말이다. 특별히 성만찬의 틀인 4중 행위는 현대의 예배에 대한 여러 개혁적 고려들에 대해 중요한 방향과 지침을 제공하고 있다. 그 내용과 실행의 방법과 거기서 울어나는 상징성을 통해서 4중 행위는 역사적 과정에서 교회가 갈고 다듬은 건전한 신학을 담고 있는 중요한 태(胎)가 되어 왔기 때문이다. 오늘의 시대적인 상황에서 비록 예배가 동시대적인 요청에 대해서도 열린 자세를 가져야 하겠지만 전통에 대한 겸손한 의뢰는 여전히 필요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성만찬의 4중 행위의 올바른 이해와 실행은 자칫 황폐해지거나, 왜곡되거나, 균형을 잃거나, 심지어 방향마저 상실할 수 있는 오늘 우리의 예배를 위한 필요한 좌표가 될 수 있을 것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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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환
들어가는 말
한국 개신교회의 대다수는 그 동안 교파와 교단에 상관없이 내용과 형태가 서로 크게 다르지 않으면서 설교가 중심이 된 예배를 드려왔다. 이런 양태에 이렇다할 큰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많은 교회들이 전통적인 예배에 대한 관심이나 동시대적인 상황을 고려한 예배에 대한 관심을 확대해 가면서 예배의 다양성이 눈에 띄게 늘어가고 있는 현실이다. 그 가운데는 전자와 같이 예배의 예전적인 측면의 중요성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고 성찬의 위상을 회복하고자 노력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후자와 같이 현대적인 구미를 살려 예배에서 형식의 자유를 크게 허용하고 예술적 장르를 다양하게 활용하여 예배의 대중화를 시도하는 그룹들이 있다. 이러한 동향과 시대적인 현실에 직면하여 많은 교회들이 예배를 바라보면서 과연 전통적 예배의 회복은 어느 만큼 필요한가 하는 것과 또 그것은 오늘날 어느 만큼의 가치와 한계를 가지고 있느냐에 대한 질문을 비롯하여 오늘의 우리에게 적절한 요소, 형식, 스타일을 갖춘 예배는 과연 무엇이냐 등에 대한 궁금증과 관심을 더해 가는 것 같다. 본고는 최근의 다양한 예배신학적 동향에 대해 특정의 경향에만 긍정하고 거기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가치중립적 입장에 서서 오히려 예배의 목적과 본질에 대한 이해를 정립하고 그 전범을 제시하는데 관심을 두었다. 이를 위하여 먼저 한국 예배의 현주소를 확인하고, 이어 특별히 성찬의 4중 행위에 대한 실제와 신학적 의미들을 탐구하면서 산발적이나마 한국교회 예배의 과거 혹은 현재의 모습들을 다루면서 그 바람직한 미래의 지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I. 세계교회와 한국교회예배의 현주소
A. 예배의 예전성(禮典性) 예배의 예전성 회복에 대한 관심은 최근 예배개혁에 관한 논의의 중심적 화두가 되고 있다. 구미 개신교회들에 비해서 한국교회가 예배개혁에 대한 필요의 인식과 그에 상응하는 반응이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그간의 개신교회의 모습에서 발견되는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한 비판적 인식에 기초하여 예배의 예전성(liturgicality) 회복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어 가고 있는 형편이다. 예전성은 예배의 의식적(儀式的) 측면과 깊이 관계되어 있다. 교회력에 따른 예배, 상징적 행위나 사물--건축물, 예복, 상징물 등을 포함해서--의 사용, 말씀과 성만찬의 연계성, 그리고 전통적 예배본문들에 대한 의존정도 등에 의해서 예전성의 정도가 가늠될 수 있을 것인데 그 중에서도 특히 말씀과 성만찬과의 관계는 논의의 핵이 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간에 한국교회는 전통적 개신교회의 특성상 말씀과 성만찬이 분리된 양태의 예배가 지배적이었다. 이로 인해 필연적으로 한국교회 예배의 예전성의 여지는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예전성의 결여는 곧 상징성의 황폐화와 연계되어 있다. 이 상징적 영역은 언어적 전달이 다 이룰 수 없는 심오한 단계의, 실재와 맞닿아 있는 영역을 차지한다. Paul Tillich는 현대 세계가 신학과 철학에 있어서 언어의 한계와 혼란에 직면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상징에 대한 역할의 강화로 이러한 한계가 극복될 수 있음을 시사하였다. 그의 지론에 의하면 상징이야말로 일상의 비상징적 언어가 다룰 수 없는 실재의 단계를 열어놓으며 인간의 종교적 영역을 움직일 수 있고 상징만이 궁극자(the Ultimate)를 나타낼 수 있다고 이해하였다. 그런데 Horton Davies는 이 상징과 성찬을 의미 있게 관련지었다. 즉, 그는 성찬을 기독교 신앙의 중심적 상징으로 보고 중시하였다. 중세의 성례전주의가 말씀의 부재로 인한 신앙의 왜곡을 초래한 반면, 개신교회는 이러한 상징의 힘이 약화되어 예배의 지성화라는 또 다른 역기능을 가져왔다. 복음이 전해지는 매개로서의 지적 호소가 필요한 것임은 분명하나 문제는 오늘의 교회들이 현실적으로 '말씀만'의 예배에 지나치게 경도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최소한의 감성적 인식의 영역인 시(視), 청(聽), 후(嗅), 미(味), 촉(觸)의 감각을 사용한 전인적 예배의 모습과 동떨어져 자칫하면 상당수 신자들이 지나친 지성화로 인해 예배로부터 소외될 가능성을 낳고 있다. 더 나아가서 '말씀'만의 예배는 오히려 말씀의 왜곡 가능성을 더 심화시켰다. 이는 설교자의 인간적, 또는 개인적 한계로 인한 부정적 역기능들도 함께 증폭시킨 것이다. Charles Rice는 '설교는 성찬에 의해서 규정되고, 그 범위가 정해지며 성만찬은 현장에서 구체화되는 본질적 복음'이라고 말한바 있다. 또 성찬 앞에서 설교하는 자는 그 성찬이 담고 있는 복음적 본질과 반하는 설교를 할 수 없게 된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예전성의 결여는 상징성의 황폐화를 가져오며 이것은 나아가서 전인적 신앙을 방해한다. 몸과 영혼,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 사이의 이원화, 그리고 그들 사이의 가치의 차이를 두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바탕과는 배치된다. 예배는 신체적 현실로부터 물러난, 단지 영적인 것을 다룸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되며 영혼과 몸을 포괄하는 전인적 예배를 지향해야 한다.
B. 예배의 신학적 바탕
한국교회의 예배의 갱신 논의 가운데 신학적 바탕의 건강성에 관한 지적이 적지 않게 있어 왔다. 이와 관련하여 아마도 '예배가 하나님이 베푸신 자리로서 그의 기선성(initiative) 혹은 주도권이 드러나고 있는가?' '하나님이 예배의 중심에 있는가?' 또 '예배에서 기독론적 전망은 견지되고 있는가?' 따라서 '예배가 구속사건을 균형 있게 드러내고 있는가?' 등의 질문들이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예배에서 하나님의 기선성은 예배의 성립의 기초를 이룬다. Robert Webber는 시내산에서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계약사건(출 19-24)을 예로 들면서 예배의 시작이 하나님의 소집에 의해서 비롯되었음(convoked)을 지적한다(출 19:1-6, 20). 인간 편에서 하나님을 찾거나 갈망하여 시작된 것이 아닌, 하나님이 먼저 부르심으로 예배 사건이 시작된다는 것으로서 계시적 신앙의 근간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예배는 인간의 고안이 아니며 인간이 그 시초를 연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여신, 약속이 있는 사건이다. 또한 예배는 인간이 자신들이 중심이 되어서, 자신들의 필요에 부응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부르는 자리가 아니다. 인간은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 불리어진 위치이다. 그러나 오늘날 종종 예배가 흔히 인간 편에서 그 바램의 성취를 위해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예배로 오해할 때가 많다. 하나님의 중심성에 대한 올바른 관점은 예배의 성격과 설교의 방향에 중요한 지침이 된다. 인간 편에서, 상황 편에서 복음을 해석하고 예배에서 그것을 구체화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편에서 현실을 바라보고 그것의 변화를 모색하는, 예배의 중심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중요하다. 다른 하나는 예배의 신학적 균형의 문제이다. 여기서 말하는 신학적 균형이란 구속사건에 대한 고른 반영이 이루어지고 있느냐의 문제이다. 오늘날 실상 많은 이름의 예배들이 특정의 목적을 위해, 특정한 측면에만 강조를 두어 진행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것이 현실적으로 기복성 집회로 자주 표출되고 있다. 넓은 의미에서 모든 신앙적 회합이 하나님을 향한 경배(worship)란 의미로서의 예배라고 지칭될 수 있을는지 모르나 보다 정당한 의미의 예배는 전체 공동체가 모인 가운데 예배 신학적 관점에서 기독교적 가치들이 균형 있게 고루 갖추어진, 정체성이 분명한 예배를 가리키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따라서 예배의 신학적 건강성을 지키는 한 방법으로서 기독론적 전망에 충실하고 있는지의 문제가 중요하게 취급될 수 있을 것이다. 예배는 초대교회로부터 예수의 부활 사건, 넓게는 일련의 구속사건 전체를 중요한 예배의 주제로 다루어 왔다. 이런 목적을 위해 교회는 초대교회 때부터 기독론적 주제를 담은 교회력을 사용하여 주기적으로 따라가면서 예배의 신학적 주제의 균형을 추구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대망--초림과 재림을 포함하는, 탄생, 세상에 드러내심, 고난, 죽으심, 부활, 교회의 성장 등이 그 내용이었다. 예배가 기독론적 초점과 전망을 갖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의 예배가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을 재연하는 체계적 틀과 배경을 가지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예배의 신학적 바탕은 곧 예배를 통해 존속되고 양육되는 신앙공동체의 건강성을 좌우하는 중요한 부분이 아닐 수 없다. 한국교회의 예배가 지금까지 과연 올바른 예배 신학적 기초 위에서, 또 그에 따른 끊임없는 검증에 의해 자정적 과정을 통해 시행되어 왔는지에 대해 질문한다면 그다지 긍정적인 답을 얻기가 어려우리라고 본다. 교회의 중심적 행위인 예배가 중요한 만큼 올바른 예배 신학적 바탕 또한 중요한 관건이 아닐 수 없다.
C. 예배 속에서의 회중(會衆)
예배 및 설교학자인 Charles Rice는 그의 책 Embodied Word에서 오늘날 예배를 위해 모인 회중(會衆, congregation)이 점차 단순히 청중(聽衆, audience)으로 전락해 가는 모습을 비판적으로 진단하고 있다. 청중(聽衆)이란 그야말로 '듣는 무리'를 말한다. 이 말은 라틴어의 '듣다'라는 의미의 audire에서 나온 반면 회중(會衆)이라는 말은 '모이다'를 뜻하는 gregare에서 나온 말이다. 그래서 이 말은 '함께'를 뜻하는 접두어 com(n)과 더불어 '함께 모인 무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예배에 참여하는 공동체는 개인의 참여나 결단과는 거리가 먼, 단순한 방관자와 같은 '듣는 무리'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함께 모여 예배의 공동집례자(co-celebrant)가 되어 하나님을 찬미하고 그 책임적 연대를 새롭게 해야하는 것이 예배다. 여기서의 진정한 청중은 바로 하나님일 뿐이다. 이런 관점에서 예배 공동체인 회중(會衆)의 두 가지 당위적 특징을 지적할 수 있다. 먼저 회중은 '함께' 하는 공동체라는 것이다. 오늘날 첨단정보화시대의 이기인 컴퓨터로 인해 많은 특혜를 누리고 살지만 동시에 사이버 공간에 형성되는 비 물리적 공간을 통한 커뮤니케이션이나 그 유용성에 대한 과신으로 인해 인간의 만남이 온전하여지지 못하고 더불어 서로에 대한 연대와 책임을 상실해 갈 위협에 직면하고 있다. 아직 한국교회에 이런 움직임이 미미하지만 마치 현재의 예배가 미래에는 사이버 예배로 대체(代替)할 수 있는 양 기대하는 목소리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이것은 결국 예배를 통해 일어나야 할 전인적 헌신과 성도간의 수평적 연대 및 책임을 깨뜨리는 위험한 가정이 될 것이다. 시대와 문명이 아무리 변하여도 기독교 신앙공동체의 예배는 신체적 참여(physical presence)가 동반되는 '함께 모이는' 자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함께 함을 통해서 서로에 대한 공동적 관심(common concerns)을 나누는 일은 기독교 예배의 중요한 바탕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곧 대 사회적 봉사의 영역에 대해서도 무관심할 수 없는 교회의 자세를 예배가 드러내 주고 있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회중은 예배의 능동적 참여자라는 것이다. 앞서 예시한 예배신학자인 Robert Webber가 관찰한 성서상의 예배는 모든 참여자가 능동적이었다는 것이다. 즉, 모세에게 지도력이 부여되었는가 하면, 아론, 나답, 아비후, 칠십 장로, 그리고 청년들에게 나머지 다른 역할들이 주어졌으며 각자 주어진 역할들을 수행함으로써 수동적인 관객이 아닌 능동적 참여자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장면은 지도자와 청중(audience)의 관계가 아니라 모두가 회중(congregation)의 일부로서 각자 자기에게 주어진 일들을 수행하는 조화로운 참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출 24:1, 5).그러나 오늘날 개신교회의 말씀중심의 예배는 자칫하면 설교자의 부각과 함께 회중의 주변화 및 무관심을 야기 시킬 수 있는 구조를 띄고 있다. Craig Erickson은 수동적 예배는 흔히 빠지기 쉬운 함정이라고 지적한 뒤 활동적 예배의 형태가 되려면 신자들의 참여가 충분하고도 의식될만한 수준에 이르게 하며 또 그것을 고무시키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예전적인 예배에서 흔히 등장하는 환호사(acclamations)--사람들이 예배 중에 응답의 방법으로 외치는 고정형식, 응답, 시편가의 교송, 상징들의 사용, 교창(antiphone), 교회력에 따른 색깔(colors)의 사용, 제스쳐, 행동, 침묵 등을 사용하는 것이 적극적 참여를 유도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종교개혁이후 예배의 순서들이 비교적 많이 일반 신자들에게 위임되고 있지만 여전히 오늘의 우리의 예배는 회중이 참여자로서 관여하는 예배 양태이기보다는 설교자와 사회자 및 성가대 등에게 대체적으로 집례가 국한되어 있고 대부분의 신자들은 그야말로 수동적인 상태로 남아 있게 되는 경우가 많다. 초대교회 예배에서의 신자들의 역할은 예배의 유효성을 결정하는 파트너였다. Justine Martyr가 소개한 예식에 보면, 집례자가 재량껏 성만찬기도를 마치고 나면 사람들의 아멘으로 답하는 부분이 나오는데 이것을 Bard Thompson은 회중이 아멘이라는 응답을 통해서 기도를 승인하는 것으로 보았다.회중은 개인적인 관심에만 묶여있는 사람들의 무리가 아니라 서로 서로에 대해서 책임적인 연대감을 나누어야 하는 무리인 것이다. 예배는 바로 이러한 성격을 지닌 회중의 참여에 의해서 드려지는 공동의 행사인 것이다. 이에 참여하는 각 개인들은 결코 수동적인 관망자가 아닌 예배의 성립을 가능케 하는 참여자로 인식되어야 할 것이다.
II. 성찬의 4중 행위와 예배의 본질
한국교회의 예배의 현황에 대한 비평적 지적과 더불어 상응하는 대안들은 다양하게 제시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그러한 주제들에 대해 성찬, 그 중에서도 특히 4중 행위에 대한 탐구를 통해서 대안들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성만찬의 사중행위는 개신교 성찬에서 오랫동안 구체적 형태로 지켜져 왔던 것은 아니었다. 공관복음서(막 14:22-26; 마 26:26-30; 눅 22:14-22)와 바울 서신(고전 11장 23-26)에 나타난 제정기사는 비록 각각의 순서가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4가지 핵심적 행위를 묘사하고 있다. 그 내용은 떡을 취하고(take), 축사한 뒤(bless), 떼어(break), 주는(give) 행위이다. 이 네 가지 행위는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기독교 예배 역사 안에서 봉헌예식(Offertory), 성찬기도(Eucharistic Prayer), 분병(Fraction), 수찬(Communion) 등의 네 가지 성만찬의 장으로 발전하였다. 이들은 상호 보완적이며 깊이 연관되어 있어서 전체적으로 예배의 정신을 통전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이들 각각의 내용과 의미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오늘의 예배가 추구하는 갱신의 방향에 중요한 자료들을 제공할 수 있다고 본다. 이들은 전통적인 예배문서들과 현대의 주요 개신교 교단들의 성만찬 예식문 속에서 발견이 되는데 그에 대한 검토는 예배에 대한 개신교적 이해들을 통시적으로 검토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다.
A. 성물의 봉헌 - 떡과 포도주를 취함보통 설교부분이 끝나고 성찬이 시작되면서(성찬이 시행되는 경우를 전제하여) 첫 번째 행위는 떡과 포도주를 취하는(take) 일이다. 이 부분은 바로 집례자가 회중으로부터 성찬예식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봉헌물을 받는 순서이다. 바람직한 경우는 아니나 과거에는 성물(elements)들이 예식이 시작되기 전에 미리 성찬상에 배열되어 있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 경우에는 덮고 있던 성찬보를 조심스럽게 걷는 것이 성물을 들고 제단 앞으로 행진하여 나아가는 일을 대신하였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문서들에는 회중의 무리가 집례자에게 성물을 가져다 드리는 일종의 봉헌(Offertory)절차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오늘날의 교회들도 상당수 이와 같이 성물을 헌금과 함께 헌금위원이나 성물운반자들을 통해 단까지 행진하여 나가 드리도록 한 뒤 이어서 집례자가 성물과 헌금을 분리하여 성물은 성찬상에, 그리고 헌금은 따로 놓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이 행위가 있는 시점에서 집례자가 드리는 봉헌기도는 성만찬의 첫 단계의 성격을 잘 반영하고 있다. 성공회의 Book of Common Prayer의 79년 판에 따르면, "우리가 가져온 일상적인 것을 받으시고 신성한 은총의 선하심으로 우리에게 가져온 그 이상으로 갚아주시기를" 기도한다. 그래서 "우리 가운데 오려서 우리와 함께 일하시는 그리스도를 앎으로써 강건해 지기를" 기도한다. 또한 여기서 드려지는 성물의 내용에 관하여 Justine Martyr의 제 1 변증론에 보면, 오늘의 관행과 비교해서 볼 때 색다른 부분이 있음을 확인케 된다. 성만찬 성물과는 구별해서 드리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예배 안에서 고아, 과부, 몸이 아프거나 어떤 이유로 인해 궁핍한 자, 그리고 나그네들을 위해서 따로 헌금을 하였고 이것을 회중의 의장--당시로는 성직자--은 그들을 돌보기 위해 이것들을 관리하였다. 그러나 성만찬의 봉헌행위(take) 중에 아예 직접적으로 성물 이외의 요소들을 드렸던 한 사례를 5, 6세기 비잔틴 예식에서 발견하게 된다. 여기에 바쳐진 봉헌물들의 일부는 성물로 사용키 위해, 일부는 성직자의 생활비를, 그리고 일부는 가난한 자를 위한 구제물을 위해 함께 드려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성만찬의 첫 번째 행위에서 오늘을 위한 몇 가지 중요한 의미들을 발견하게 된다.첫째는, 회중이 그들의 땀과 수고를 드려 생산한 수확물을 하나님께 직접 드리는 일이 상징적 행위인 성물운반 및 행진을 통해서 실행되는 것이 고전적인 모범이라는 점이다. 예배는 인간이 자신들의 노력과 삶을 투자하여 획득한 것의 일부를 하나님께 드려서 인간의 소유 전체가 다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물론 여기서 사람들이 드리는 소재의 근원은 먼저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이다. 이 사실을 봉헌기도의 내용이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하나님과 인간의 상호 나눔이 하나님의 주도하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가시적인, 혹은 불가시적인 모든 것의 주도권을 가지시고 예배를 통해 인간과 대화를 나누시는 것이다. 둘째, 여기서 드려지는 산물은 특정지역, 특정 예배자들에 따라 다른 것들이 될 수 있다. 그것들은 자신들이 속한 삶의 터전에서 산출된 것들이기에 그렇다. 이것은 곧 개개 지역교회들의 문화적인 환경과 삶에 대해 예배는 다양성에 대한 포용적 입장을 지닐 필요를 시사한다. 오늘날 예배의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 문화의 옷을 입는 일에 대해 많은 공감이 확산되고 있다. 자신들이 속한 문화권에서 나온 상징물들--한국의 경우로 예를 들자면, 밀로 만든 빵 대신에 쌀로 만든 떡--은 그들의 신학과 예배의 독자성을 위해서도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다양성이 필연적인 지구촌 각 교회 공동체들이 각자 자신의 문화의 결과들에 대한 긍정이 없이는 자신에 대한 정체도 잃어버리기 쉽거니와 나 아닌 남을 향한 끝없는 종속성의 틀을 벗어날 수밖에 없다. 셋째는 봉헌물의 종류는 예배가 사회적 영역을 포함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앞서 소개한 동방정교회에서는 오늘날로 말하자면 금전적 의미의 헌금과 기타 구제를 위한 물품이 성물과 함께 드려지고 있다. 초대교회 때부터 이웃에 대해 관심은 교회의 선교의 중요한 부분이었음을 보여준다. 부유한 자는 예배처소에 물건을 선물로 가져와 예배 목적을 위한 성물과 성직자의 삶에 필요한 것을 드릴뿐만이 아니라 가난한 이웃의 생활을 지원하였다.
B. 성찬기도 - 감사를 드림 드려진 성물을 놓고 하나님을 향하여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두 번째 행위는 오랫동안 성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의 하나로 인식되었다. 왜냐하면 이 단계에서 그리스도의 실제적 임재(real presence)가 일어난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 또 개신교 내 여러 진영들 간의 분열의 중심 축에는, 이곳에서 일어나는 그리스도의 임재양식에 대한 해석의 차이가 중요한 원인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이 부분은 전체적으로 집례자가 행하는 기도로서 그 내용을 보면 하나님의 위대한 행적에 대한 찬미,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에 대한 기념, 성령의 초빙(Epiclesis)을 위한 기도, 영광송(doxology) 등이 포함되나 히브리적 전통(시편 148편)에서 발견되는 기도의 스타일로서 제정사(the words of institution)와 같은 내레이션이 삽입되고 있다. 흔히 이 부분은 초대교회의 성만찬의 명칭이 '감사'라는 의미의 헬라어, eucharistia에서 온 것임을 강조하면서 대감사(the Great Thanksgiving)라는 명칭으로 많이 불리어지고 있다.기도를 드리는 몸자세 역시 성만찬 신학의 의미들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검토자료이다. 중세기에는 이 성만찬 기도 시 사제는 제단이 놓인 동쪽 벽을 향한 채 회중에게는 등을 돌리고 행하였다. 성만찬의 성격을 희생제사로 부각시켰던 시대상황에서 사제는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을 향해 선 일종의 제주(祭主)로서의 역할이 강조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개신교의 성찬은 더 이상 희생제사--그리스도의 실제 몸과 피로 변한 것을 쪼개고, 부어 제물로 바치는--의 의미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부활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식사요 잔치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에 회중을 바라보면 서는 것이 일반적이다. 집례자는 잔치를 여신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거기에 서있는 것이다. 지상의 그 어떤 주최인도 식탁에서 벽을 향한 채 손님과는 등을 돌리고 식사를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집례자의 이런 자세는 그의 이중적 대표성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사람들에게는 참된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대표하며 동시에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을 대표한다. 또 일부 어떤 전통에서 참회나 겸손을 표상하여 집례자가 무릎을 꿇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오늘날 대체적으로는 유대인과 초대기독교인들이 하던 관습대로, 또 디모데 전서 2장 8절에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라는 말과 같이 서서 기도한다. 이 기도 중에 회중은 고개를 숙이거나 눈을 감기보다는 집례자의 기도와 몸짓에 주목하며 참여한다. 이러한 자세들은 집례자와의 일치감 속에서 기도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기쁨과 감사를 내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여기서 성령초빙(Epiklesis)은 과거와 같이 떡과 포도주의 성변화(consecration)를 위한 것이기보다는 '회중을 위해 그리스도의 몸이 되게 해달라' 혹은 '성령이 회중에게 임하시어 그들을 변화시키시기'를 구하는 기도가 드려진다. 성만찬의 두 번째 행위인 대감사기도 안에서도 역시 오늘의 예배신학적 지침들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는, 대감사기도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위대한 행위에 대한 내레이션이 담겨져 있다는 것이다. 먼저 성부 하나님의 창조하심과 섭리, 성자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 성령 하나님의 내재적인 역사 등이 칭송될 뿐만 아니라 그 모든 것이 오늘에도 현재화되기를 기도하고 있다. 예배는 시대와 상황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항구적으로 이 사실이 늘 회상되어야 함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위대한 행적과 그의 현재적인 역사를 반복적으로 재연하는 것은 곧 기독교 신앙의 건강한 형성을 위한 중요한 밑거름이며, 동시에 회중의 변화를 이끌어 내는 힘이 되고 있다. 둘째는, 예배 안에서 내재적인 성령의 역사가 긍정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부분에 따르면 성령은 곧 가장 중요한 사건의 주체로 기능하고 있다. 예배 안에서 초자연적이고 주체적인 성령의 역사에 대한 개방된 태도가 깃들어 있다는 것이다. 다만 오늘의 개신교회의 성만찬 기도는 성변화의 대상을 성물로 보지 않고 회중에게 두고 있다는 변화가 목도된다. 과거 중세기와 오늘날의 일부 전통에서는 여전히 변화의 대상이 떡과 포도주에 국한되어 있다. 그러나 정작 현대 예전의 모범이랄 수 있는 3세기초의 사도전승(Apostolic Tradition)의 성령초빙기도에도 그 대상이 회중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셋째는, 회중이 능동적 참여자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집례자는 과거와 달리 회중을 향하여 선다. 이것은 곧 회중이 예배의 참여자로 포괄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집례자가 홀로 주관하는 제사적 예배에 수동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참여자로서 하나님이 베푸신 잔치에 참여하는 자들이다. 오늘날 예배 안에서 신자들이 구체적 순서에 참여하는 추세가 증가되고 있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그 외에도 성만찬은 감사를 드리는 장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예수께서 떡을 떼시며 감사했던 것처럼 집례자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감사(thanksgiving, eucharistia)를 드리는 것이지 결코 제사를 준비하는 사전적 절차가 아니다. 예배 또한 감사를 드리는 사건이지 우리의 공로를 하나님께 드리는 장이 아닌 것을 시사한다.
C. 분병 - 떡을 뗌 이 행위는 대감사기도가 끝난 후, 떡을 떼는 순서이다. 소위 분병(Fraction, 聖體分割)이다. 떡은 상징적 행위로 한번만 떼며 회중들이 충분히 관찰할 수 있도록 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예식서들을 보면 이 부분에 그 의미를 반영하는 한 개 이상의 적절한 구절들을 삽입하고 있다. 예를 들어서 미국 장로교회의 Book of Common Worship에서는 바울의 고전 10장 16-17의 말이 인용되는데 집례자는 사람들 앞에 떼지 않은 떡을 보여주며 말하기를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라고 한 뒤 떡을 떼고 이어서 말한다.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떡은 그런 다음 성찬상에 놓여지고 주전자로부터 포도주를 잔에 채운 다음 그것을 회중들 앞에서 들면서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냐?"라고 한다. 이어서 떡과 잔을 들은 채 초청의 말을 잇는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하나님의 선물이라"라고 말한다. 여기서의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희생을 보여준다. Thomas Oden은 이 분병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부서지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만이 아니다. 그의 심장, 곧 모든 인간의 고뇌 속에 상징적 으로 참여하는 그의 심장이다. 떡과 포도주는 상징적으로 전체 그리스도(그의 몸과 영 혼)을 상징한다. 고대사회의 생리학에서는 피는 탁월한 생명의 상징이었다. 유대인들의 제사에서 피를 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었다...하나님은 우리의 양식이 되셨다. 이러한 부서짐이 없이는 어떠한 영적인 양육(nurture)이나 먹임(feeding)이 가능치 않다. 그렇기 때문에 집례자는 예식에서 물리적으로 눈에 보이게 사람들 앞에서 이 떡을 부수는 일이 필요하다.이러한 견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성찬이 전하는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하지만 이런 의미가 한편으로는 너무 지나치게 강조되어 중세는 물론이고 개신교회 안에서도 여러 세기를 거쳐오는 동안 성찬의 전체 의식이 대체로 이 '떡을 뗌(the breaking of bread)'의 단계에 지나치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즉,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한 정서를 너무 지배적으로 반영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종종 비판되듯 성찬이 장례식 분위기를 연상시킨다는 힐난을 받아 왔다. 이 정서는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성찬식이 귀결해야 하는 지배적 정서는 아니라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떡을 떼는 행위 속에서 나타나는 오늘의 예배 신학적 지침들은 어떤 것들인가? 첫째로 생각해야 할 것은, 분병은 곧 그리스도의 희생의 사건이요, 자기를 내어줌의 사건이다. 유대적 전통에서는 희생은 곧 피흘림을 수반하였다. 비록 동물을 잡아서 드리는 희생제물이 오늘의 우리에게는 혐오스러우나 희생제물을 가져온 사람은 그것을 통해 자신의 희생을 은유하였다. 회개와 화해의 가시적 표시로서 하나님께 가치 있는 어떤 것을 드림으로써 자신을 줌을 상징한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이 죽는 것이며 속죄를 이루는 것이며 화해를 성취하는 것이다. 분병에 참여함으로써 신자들은 자신을 위해 대신 죽은 그리스도의 희생에 참여한다. 이것은 곧 슬픔의 자리요 참회의 자리이다. 간혹 성만찬을 단순히 축제적 분위기로만 이해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는데 만일 이 분병, 곧 그리스도의 희생이라는 정서를 먼저 거치지 않는 축제성은 무의미하다. 이러한 정서는 예배에서 반드시 반영되어야 할 부분이다. 미국장로교회는 칼빈의 전통을 이어서 고백과 용서(confession and pardon)의 항목을 예배의 초두에 두고 있다. 또 미국 루터교회는 입례송이 있기 전에 고백과 용서(confession and forgiveness)의 의식을 선행하고 있다. 둘째로 생각해야 할 것은 오늘날 이 부분에 대한 신학적 이해가 과도하게 무시되려는 경향이 있다. 부활의 기쁨에 앞서서 고난에 참여하는 과정이 있다는 점이 무시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것은 곧 예전적 교회들의 예전갱신운동과 개신교회의 갱신운동을 구분하지 못한 데서 오는 오류이다. 개신교에서의 예배정서에 비해 로마 가톨릭 교회는 오랜 전통을 지내오면서 미사의 중심이 희생제사였기에 미사 전체가 장례식 분위기(funeral mood)에 지나치게 경도 되어 있다는 자체적 비판이 있어 왔다. 그러나 개신교회의 예배 분위기는 대체로 축제적 성격을 견지하는 편이다. 성찬식도 전체적으로는 이런 분위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 무거운 분위기의 찬송가가 선택될지라도 축제성의 회복을 강조하리만큼 장례식 분위기는 아니다. 아울러 셋째로, 이 분병은 그리스도의 희생에 신자들이 동참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스도를 따름에는 고난의 과정을 함축하고 있다. 그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일은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 예배는 위로와 환희뿐만이 아닌 십자가의 삶에 대한 다짐과 실천을 요청하는 자리임을 보여주고 있다.
D. 수찬 - 떡과 포도주를 나눔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주고 받는 수찬은 바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을 이루는 극적인 순간이다. 중세교회는 여기서 받게 되는 성물은 그리스도의 진정한 살이며 피라는 것을 굳게 믿었다. 그 결과 성만찬 신학의 초점이 대상화되는 문제를 낳았다. 그러나 개신교의 성만찬 신학은 앞서서 지적한 대로 성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 않음이 분명하다. 오히려 성만찬 행위에 참여하는 회중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떡과 포도주를 받는 무리들은 여기서 다시금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리라'고 약속하신 그리스도의 진정한 임재를 맛보며 그와 더불어, 또 사람들과 교제(communion)를 나누게 된다. 이 수찬은 또한 세상의 끝 날을 지시한다. 그 날은 영화(榮華)된 주와 함께 인간역사의 완성된 모습을 나누게 되는 때이다. 그것이 성찬 속에서 이미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BEM 문서는 성만찬은 약속되어진 대로 하나님이 온전히 통치하시는 모습을 열어 놓으며 그것은 창조가 궁극적 갱신에 이르는 미래임을 시사하고 있다. 이것은 곧 하나님 나라의 도래이다. 성만찬은 이런 상징들--창조의 궁극적 갱신--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며 또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오심을 기쁘게 경축하며 기다리는 잔치'라고 표현하였다. 미연합감리교회의 Book of Worship에는 수찬을 마친 후 파송 하기에 앞서 '영원하신 하나님이시여, 당신이 우리를 위해 자신을 주신 이 거룩한 신비에 대해 우리가 감사하나이다. 성령의 권능으로 그 나라에 들어가게 하옵시고 우리 자신들을 다른 사람을 위해 드리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며 마감한다. 그 나라에 들어감을 간절히 간구하고 있다. 성만찬의 참여는 곧 이와 같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물씬 담고 있다. 교단 및 교파별로 다양한 모습을 띄고 있는 수찬의 양태 속에도 중요한 성만찬 신학들이 내재하여 있다. 예를 들어 침례교, 장로교, 제자교회 등은 의자에 앉은 채 배찬을 담당한 평신도들에 의해서 각자에게 분배해주며 한국의 대부분 개신교회들도 이 방식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공회, 루터교회, 감리교회들은 단(檀)에 설치된 난간(communion rail)으로 나아가서 계단에 무릎을 꾼 채 떡과 포도주를 받는다. 이들 중에서 어떤 교회들은 제 2차 바디칸 이후의 자세, 즉 서서 받는 자세를 취한다. 어느 곳에서는 무릎 꿇는 계단을 없앴다. 어떤 예에서는 예배자들은 서서 떡을 받은 다음 기도를 위해 난간에 무릎을 꿇도록 하는 선택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오늘날 대체적으로 많은 교회들이 성만찬 신학의 갱신을 통해 서서 떡을 받도록 하는 추세이다. 떡과 포도주를 받는 것은 부활의 주와 깊이 만남을 상징하며 일종의 미래를 향한 희망을 나타낸다. 성찬은 참회의 예식으로 끝나지 않고 감사와 소망으로 맺는 예식이다.수찬은 예배의 절정을 시사한다. 여기에는 중요한 예배 신학적 의미들이 담겨져 있다. 첫째는, 수찬은 곧 부활에 동참하는 자리이다. 그러므로 성만찬, 더 나아가서 예배 또한 부활의 주를 경축하는 중요한 장으로 귀결되어야 한다. 원시교회 때부터 안식 후 첫날인 제 8일, 곧 주일은 곧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축하는 날이었다. 사순절 기간 속에 들어있는 6개의 주일마저도 원칙적으로는 사순절의 분위기에 종속되지 않고 여전히 부활을 경축하는 시기로 보았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은 십자가 없는 부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앞서 살펴본 대로 수찬에서 상징되는 부활의 경축과 참여는 분병의 정서가 전제되어야 함은 두말할 나위 없다.둘째로, 수찬은 미래의 하나님나라를 가리켜 준다.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에서 부활의 주와 더불어 나누게 되는 온전한 축제의 식사를 지시한다. 이러한 성만찬의 의미는 예배의 지향점을 드러내고 있다. 예배는 곧 현재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곳이면서도 동시에 여전히 완성을 대망하는 이중적 지향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의 잔치로 만족할 수 없는 것이며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더불어 있게 되는 혼인잔치와 잇대어 있는 소망의 잔치이다. 예배는 이와 같이 현실에 안주하도록 하지 않고 미래의 완성된 현실을 향해 나아가도록 격려하여야 한다.
III. 실제적 적용의 방법과 그 지향
전통적인 성찬예전에 대한 바른 이해와 실행은 예배의 정신을 지켜 나가는 중요한 근간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단순히 간결하게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것으로 성찬예배의 목적이 올바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성찬식은 앞서 논의한 대로 그 속에 담겨진 축적된 내용들이 상징적 행위와 사물을 통해서 얼마나 구현되느냐의 여부에 성패가 달려있다. 따라서 예배의 근간을 이루는 중요한 내용들이 담겨져 있는 성만찬의 4중 행위는 성찬의 비중의 회복과 더불어 더욱 중요한 고려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이 4중 행위에서 나타난 예배의 정신은 그 적용의 과정에서 과연 어떤 실제적 문제들을 지니고 있으며 적용상의 어떤 방법적 혜안(慧眼)들이 요청되고 있는가?
A. 전통과 동시대적 요청전통과 동시대적 요청은 기독교 예배가 끊임없는 긴장을 가지고 견지해야 할 중요한 두 기둥이라고 볼 수 있다. 전통은 곧 시대와 상황과 문화를 뛰어 넘어서 기독교의 본질적 메시지가 적용되면서 나타난 구체적 해석의 역사라고도 볼 수 있다. 그것은 곧 오늘 우리의 신학적 전개를 위한 좋은 거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예배와 관련해서 전통의 의미는 남다를 수밖에 없다. 성서는 복음에 대한 신학적 진술을 기초로 하여 쓰여진 것이기에 예전적 내용이나 체계에 대한 자료들은 오히려 후대의 교회의 전통 속에 보존된 본문들에 의해서 더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 말은 성서 속에 나오는 예배의 단편적 기술들이 후대의 발전적 형태의 예배들과 본질적으로 상이한 점들을 갖고 있다거나 결여된 부분이 있다거나 하는 말이 아니라 복음과 신앙을 표현하는 방식이 시대가 지나가면서 당대의 상황적 요청에 부응하여 발전적 형태로 자리잡아가고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것은 동시에 예배의 형태가 선험적 형태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아니므로 동시대적 상황에 따라 그 표현방식의 변용이 필요할 수 있음을 시사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시켜서 Baumstark의 말에 따르면 오래된 본문일수록 성서의 표현을 덜 직접적으로 담고 있다고 한다. 즉, 성서적 정신을 담고는 있지만 문자적으로 본문을 담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반면 이후의 것일수록 더욱 분명하게 교리적으로, 신학적으로 잘 정리된 것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성찬의 전통은 오랜 역사를 통해서 다양한 상황과 처지에서 복음의 본질을 담기 위한 고투 속에 피어난 발전적 결정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동서방을 막론하고 심지어 같은 서방 안에서의 여러 가지 예전들이 존재하지만 그들 예전의 틀은 비록 성찬신학의 차이가 있고 그 내용들의 첨삭 및 순서의 바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실제적 실행의 모습은 놀랍도록 본질적 일치를 이루고 특정한 목적을 지향하고 있다는 사실은 전통에 대한 신뢰를 한층 높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먼저 성만찬의 전통적인 형식과 의미에 대한 바른 회복이 필요하다. 오늘날 일부 개신교회에서 시행하는 대로 전통적 예문은 배제되어 있거나 거리가 먼, 성만찬의 실행은 사실상 큰 의미가 없다. 오히려 그것은 중세적 성례전주의의 다른 얼굴이 될 수 있다. 떡과 포도주를 받아먹고 마시는 그 자체에 성찬의 의미를 두는 것은 곧 성물에 대한 마술적 효험을 기대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이것은 상징적 행위와 더불어 복음을 수용하는 사건이다. 따라서 오늘과 같은 상황에서 성만찬을 매주 시행해야만 된다든지, 성만찬이 설교보다 더 중시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논의의 본질적 핵심은 아니다. 전통의 복원과 관련해서 또 한가지 고려할 수 있는 것은 오늘날에 이 성찬을 구현하는 방식으로서 창의성의 범위는 어느 정도가 되어야 할 것인가? 목회자나 신학자가 성찬을 시행함에 있어서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언어를 채택하고 사용하는 일이나 혹은 그의 개인적인 문학적 창의성을 사용하여 성례전적 행위의 내용을 독립적으로 바꾸는 일은 매우 신중성이 요구되는 일이다. 개인적인 창의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전통의 복원이라는 점을 지적한 것이라고 판단된다. 다만 사용되는 언어의 동시대성, 기도의 목표가 되는 동시대적 주제들의 적절성, 풍성한 정보에 노출된 오늘의 시대적 상황에 맞는 간결성, 변화된 상징체계 등을 현실화하는 것이 중요한 관건이라고 여겨진다.
B. 사중행위의 의미와 적용성만찬의 4중 행위는 예배가 지향해야 하는 정신들을 골고루 반영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이것들은 그 가운데서 어느 특정의 행위나 그 의미만이 강조되거나 또는 역으로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 이들은 예배의 정신에 고르게 반영되어야 하는 통전적 일부이다. 먼저 성물의 봉헌은 곧 인간이 하나님께 헌신하는 부분이다. 우리는 성찬에 임하면서 먼저 우리가 하나님 앞에 헌신을 드리고 그에게로 나아감을 필요로 한다. 인간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곧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헌신의 산물은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예배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대화이지만 동시에 그 대화의 이니셔티브는 하나님께 있음을 잊으면 안 된다. 예배의 정신의 근본적 배경에는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주도적인 도움이 있다. 오늘날 에큐메니칼 형태의 예배순서를 크게 네 개의 장, 도입(entrance) 혹은 모임(gathering)--예배를 준비하는 부분, 말씀(word)--성경봉독과 설교가 중심, 성찬(table)--세례가 있을 때는 세례를 포함하는 성례전 부분, 파송(sending forth)--예배자들을 세상으로 다시 보내는 장--으로 구분할 때, 그 첫 장에 해당되는 도입, 혹은 모임 부분에 모두 '예배에의 부름'--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을 예배로 부르심--이라는 순서가 첫 요소, 혹은 중심요소로 들어가 있다. 하나님이 예배를 여신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부분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없으면 예배에서 하나님의 주도권을 경시하고 인간의 가치를 강조하게 된다. 예배는 인간이 지니는 한계에 대한 인식을 기초로 한다. 다음으로 성찬기도는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드리는 감사이며 하나님이 그곳에 모인 자들을 위해 축복하시기를 간구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창조와 섭리를 행하시는 성부 하나님, 구속의 역사를 이루신 성자 하나님, 그 완성을 오늘의 현실에 구현하시는 성령 하나님이 이 기도문 속에 들어 있다. 여기에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각 위의 역할이 분담된 가운데 그 역사가 골고루 표현되고 있다. 이것은 곧 예배의 대상은 바로 삼위적(Trinitarian)이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 예배는 기독론적 전망을 견지하되 삼위일체가 예배의 대상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또한 성찬기도를 통한 축복의 수혜자는 대상물이 아닌, 모인 무리이다. 과거 성찬기도는 그 핵심이 성물의 성변화(consecration)에 국한되어 결과적으로 여러 모순을 남겼다. 그러나 개신교회의 성찬기도는 삼위 하나님에 대한 찬미의 내레이션과 함께 그곳에 모인 자들의 변화를 통한 온전한 교제(communion)를 지향한다. 세 번째 행위인 분병은 곧 죽음과 희생의 사건에 대한 기념의 측면이 강하다. 이미 복음서와 바울 서신에서 나온 대로 제정사는 곧 예수의 '죽음의 기념'이었다. 그러나 또한 부활 후의 성찬은 부활의 기쁨을 나누는 것이었다. 이 둘은 균형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전자는 지난 서방교회의 역사 속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입장이었다. 화체화된 예수의 죽음 사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기에 예배 자체가 장황하고 어둡고 음울한 분위기가 지배했다. 성만찬의 4중 행위 중, 이 부분에 특별한 강조가 있었던 셈이다. 이 부분이 분명 예배의 주요한 요소를 이루고 있음에는 이의의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오늘에 와서 성만찬은, 혹은 넓게 말해서 예배는 기쁨과 축제의 잔치였다고 만 주장하는 것은 균형을 잃은 견해가 될 수 있다. 이 부분은 결코 기쁨의 축제로서의 예배라는 이름으로 무시되거나 약화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다만 이 부분이 또 예배의 전형적 의미인양 강조되어서도 안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수찬은 곧 그리스도의 부활에의 참여를 의미한다. 이 부분은 분명 오늘날 기쁨을 잃어버린 예배, 축제성을 상실한 예배 등에 도전을 가하는 예배의 측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부분만이 지배적인 예배의 정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예배가 부활의 잔치로서 일찍부터 자리잡았지만 그 부활의 축제성은 종결로서 주어지는 것이지 그리스도의 몸의 고난도 전제되지 않은 예배의 분위기가 시종을 지배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무가치성과 죄성의 극복을 위한 준비적 자세를 불필요하게 만들 수 있다. 이 네 가지는 모두 다 중요한 것으로서 그 중의 하나만 강조되고 다른 것이 배제되면 안될 것이다. 오늘날의 예배와 성찬은 이 네 가지의 고른 균형 속에서 특정 주제에 편중되지 않는 가운데 시행될 때, 예배의 목적을 올바로 구현할 수 있을 것이다. 성찬은 준비하고 희생의 과정을 거친 뒤, 축제적 분위기로 나아가는 일이 필요하다.
C. 본문과 상황의 관계 전통적 성만찬에 관한 내용과 형식에 대한 존중의 필요에 대해서는 이미 충분한 논의가 된 것으로 본다. 그런데 이것을 개인이 속한 각각의 문화 속에서 실제 시행하는 과정에서는 필연적으로 문화적인 차이가 뒤따를 것이 분명하다. 예를 들어서 성만찬 성물인 빵과 포도주는 유대적 농목축 환경에서 나온 산물이었다. 이것들을 사용하는 것은 비교적 오랜 역사를 통해서 정통교회의 관례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 지구촌 어느 환경과 사회에서나 이견이 없는 공통된 상징성을 갖게 할 것인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밀이 유대인들의 주식이었던 만큼 한국인에게는, 더 나아가서는 아시아 여러 나라에는 쌀이 주식이 되어왔기 때문이다. 더욱이 북극의 에스키모에게 밀이든 쌀이든 모두가 철저히 그들의 삶과는 무관한 것들이었다. 여기에서 문화적인 변용의 문제가 생겨나게 된다. 오늘날 개신교 예배학자들 가운데 성물에 대해 너무 가벼운 것을 사용하는 것은 적절치 않음을 지적하고 있다. 현실성과 위엄을 동시에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정의 식탁에서 나눌 수 있는 것이 가장 좋다고 본다. 일반식사와는 거리가 먼 어떤 것을 성찬 상에서 먹으라고 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예수께서 사용하지 않은 어떤 것을 채용하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말한다. 즉, 일반인들의 식사에 가까운 것의 사용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선교초기부터 문화적인 변용을 위한 노력에 대해 소극적인 입장인 편이다. 성만찬의 빵으로 사용되어온 자료(속칭, 카스테라)는 지금 구미에서도 낯선 것으로 기독교 예배전통을 따른 것도 아니거니와 우리에게도 실상은 낯선 것이었다. 우리 문화 안에서 오랜 역사를 통해 잔치의 음식이며 의식(儀式)의 매개였던 떡도 아닌 것으로서 성만찬신학의 관점에서 볼 때도, 조심스럽고 경건하게 취급되기 어려운 형태를 띄고 있다. 한 가지 더 부연하자면, 우리가 사용하는 찬송가도 마찬가지다. 한국선교 2세기에 접어든지 오래지만 찬송가의 대다수가 외국 곡조에, 외국가사로 된 것을 번역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세계교회와 동일한 곡조와 내용의 찬송가를 부른다는 것도 교회일치의 차원에서 나름대로 의미가 있지만 우리에게 친숙하고 우리의 정서를 반영하는 곡조가 희소하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예배의 문화적 변용의 문제는 우리 신학의 세계신학에 대한 독자성을 확보하고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자긍심을 높이고 회복할 수 있으며 예배의 효율을 높이는 방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예배의 중심적 상징행위인 성찬은, 그 중요성을 감안해 볼 때 상응하는 적절한 문화적 변용을 필요로 하는 부분이라고 본다. 나가는 말오늘날 예배의 개혁에 대한 움직임 가운데 예전성의 회복을 통한 개혁의 필요를 주장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와 관련해서 예배에서 성찬의 비중과 가치에 대한 긍정적 평가도 함께 확대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평가의 근저에는 성찬의 단순한 행위보다도 그 행위가 동반하는 예배 신학적 가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성찬과 관련된 해묵은 교리적 논쟁에 대한 또 하나의 주장이 아닌, 그 속에 녹아 있는 오늘을 향한 예배의 소중한 원리와 내용에 대한 재발견을 염두에 둔 말이다. 특별히 성만찬의 틀인 4중 행위는 현대의 예배에 대한 여러 개혁적 고려들에 대해 중요한 방향과 지침을 제공하고 있다. 그 내용과 실행의 방법과 거기서 울어나는 상징성을 통해서 4중 행위는 역사적 과정에서 교회가 갈고 다듬은 건전한 신학을 담고 있는 중요한 태(胎)가 되어 왔기 때문이다. 오늘의 시대적인 상황에서 비록 예배가 동시대적인 요청에 대해서도 열린 자세를 가져야 하겠지만 전통에 대한 겸손한 의뢰는 여전히 필요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성만찬의 4중 행위의 올바른 이해와 실행은 자칫 황폐해지거나, 왜곡되거나, 균형을 잃거나, 심지어 방향마저 상실할 수 있는 오늘 우리의 예배를 위한 필요한 좌표가 될 수 있을 것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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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April 6,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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