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September 5, 2007

Sunday, September 2, 2007

다문화 예배와 찬양: 읽기 자료와 해설 (Collected by 선우 혁 목사님)

저희 교회는 예배시간마다 한국의 전통 가락으로 지어진 찬송을 두 곡씩 부르고 있습니다. 그 중 한 곡은 성찬식때 부르기 때문에, 미국에서 자란 어린 아이들도 매주 한 곡씩은 전통가락 찬송을 부르게 됩니다. 성찬식 후 찬송가를 한 곡 더 부르는데, 이 때는 가능하면, 젊은세대들에게 친숙한 찬양곡을 부르려고 합니다. (연합감리교회 찬송가에 1.5세와 2세들에게 익숙한 찬양곡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대예배 시간에 부르는 찬양곡이나, 대학.청년부, 중고등부 예배시 부르는 찬양곡은 문화적 다양성을 고려하여 선곡하기를 권하고 있습니다. 성만찬의 회복, 다문화/토착화 예배, 세대간의 다리놓기 등 피할 수 없는 도전과 비전을 향해 조금씩 걸음을 떼고 있는 중이지요.
아래의 <읽기자료>들은 '다문화 교회음악'(혹은 '교회음악의 한국화/토착화')에 관한 기본적인 이해를 돕는 글들입니다.

<읽기 자료 1> 문성모, '찬송가 한국화(토착화)의 가능성과 그 범위'의 일부를 편집함
한국교회안에서 아직도 우리가락으로된 찬송가가 많지 못한 이유는 한국교회가 19세기 말의 문화적 상황을 거의 그대로 답습한채 오늘에 이르고 있기 때문이다. 전통문화에 대해 배타적인 태도가 그대로 있으며 전통음악이나 악기가 교회에 들어오는 것을 크게 비신앙적인 일로 우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안에서는 아직도 '국악'을 기생음악, 술집음악, 유흥음악 정도로 생각하여 천시하고 비웃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에서 불리워지는 찬송들이란 결국 미국찬송에 많이 쓰이던 콘트라팍타의 방법[민요에 종교적인 가사를 붙임]을 따라 만들어진것이 많으며 외국의 민요와 민간음악이 질적 변화를 일으키어 찬송가화 한 것들이 상당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한국사람으로서 확신해야할 점은 본래 기독교와 상관 없었던 이런 외국의 음악 뿐만 아니라 한국의 전통음악과 민간의 노래들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며, 이러한 가능성을 인정해 주고 적극적으로 우리민족의 교회노래로 활용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외국의 경우 민요가 찬송이 되었고 그 찬송이 다시 민요화되어 널리 불리워졌던 사실은 오늘 우리가 우리의 전통민요가락에 신앙고백적인 가사를 붙여 찬송으로 사용하고자 하는 시도에 용기를 주며 근거를 제시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찬송가로 우리민요를 직접 사용하는 일은 죄악시해왔고 불경건스러운 것으로 취급해왔다. 그러면서도 남의 나라 민요로부터온 찬송가는 아무 거부감없이 부르며 은혜를 받았다. 스코틀랜드민요로부터 온 두 찬송가 "천부여 의지없어서"와 "하늘가는 밝은 길이"는 한국교회 부흥의 일등공신이었고 수많은 영혼들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인도한 최고의 전도자였다. 한때 한국교회는 이들 찬송가가 민요출신이라 하여 업신여기고 새 곡으로 바꾸어보려고 하였지만 모두 실패하였다. 이러한 처사는 회중에게 가장 정직한 가락인 민요의 가치에 대해 무지하여 민요를 민(民)음악으로 보지 못하고 속(俗)음악으로 여겨 경시했던 결과이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의 가사에는 민요 '올드 랑 사인'(Alud lang syne) 만한 곡이 없고, '하늘가는 밝은 길이'에는 '아니로리'(Annie Laurie) 이상의 가락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스코틀랜드의 민요찬송이 우리 기독교 회중들에게도 열렬한 애창곡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이들이 한국민요처럼 5음음계의 노래이며 단순한 리듬에 반복적이며 부르기 쉬운 가락을 가졌고 곡의 분위기도 한국민요와 흡사하여 민(民)의 한(恨)을 잘 표현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흑인영가'라는 이름의 미국의 민요찬송들이 한국교회 안팎에서 크게 애창되고 있는 사실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찬송가 한국화(토착화)의 가능성과 그 범위 (문성모) http://um-ak.co.kr/gyo/moon-tochak.htm

<읽기자료 2> 홍정수, '한국 전통음악의 교회수용 문제'의 일부를 편집함
오늘날까지의 한국의 교회음악이 보여주는 특징은 서양의 교회음악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의 찬송가도, 성가대 합창음악도,‘교회음악사’와 같은 책들도 번역에 의존하고 있다. 여기에 비해 우리의 음악가들이 작곡한 교회음악은 비교적 눈에 뛰지 않는 곳에서 자라고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역사가 100년이 지나면서 새로운 움직임이 자라고 있는 것을 엿볼 수 있다. 하나는 청소년층을 중심하여 급속하게 보편화된 복음성가 운동이고, 하나는 한국의 전통음악을 기준으로 우리의 교회음악을 세우자는 운동이다. 복음성가운동은 음향재생기, 라디오매체, 또는 기타반주로 연주되는 형태 등을 통해 별 논의도 없이 주로 70년대에 즉각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여기에 비해 한국전통음악으로 교회음악을 세우자는 논의는 지속적으로 있어 왔으나 아직 교회 속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 물론 복음성가나 전통음악성가는 교회음악을 논하는 사람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아 왔고 지금도 받고 있다. 하지만 복음성가는 이미‘실질적’교회음악이 되어 있으나 전통음악성가는 아직도 그러한 단계에 와 있지 못하다. 다만 전통음악성가를 옹호하는 입장이 점점 성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전통음악 성가를 주장하는 측에서 볼 때에 한국교회의 음악환경은 매우 비관적이다. 이는 확고한 민족주의자가 아닌 사람의 입장에서도 한국교회의 찬송가책은 대단히 수치스러운 수준이다. 우리의 찬송가 수가 너무 적다. 여기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지나치게 전통음악적 배경을 갖지 않는 한국인의 찬송가도 많이 있는데 이것조차 거부되는 곳이 우리의 찬송가책이다. 과거 한국의 교회는 우리의 음악문화 전통과의 접촉을 어려워했다는 것을 우리의 찬송가책들이 확연하게 보여준다.... 교회에 놓여 있는 오르간이나 피아노 같은 악기는 국악적 교회음악을 상당히 방해하는 역할을 한다. 이 악기들이 할 수 있는 전통음악적 방법은 극히 제한되어 있고 많은 부분을 서양음악화 시킨다. 이 악기들의 이론적 바탕이 서양음악을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볼 수도 있겠으나 전통음악이 모습 그대로 퍼지기에는 큰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전통음악 쪽에서는 이 악기들을 대체할만한 것을 제공하지 못한다. 가야금과 같은 악기로 반주를 한다고 하면 그 소리가 회중들의 목소리에 눌려 묻혀버리고 말 것이다. 조금 큰 소리를 낼 수 있는 악기로는 피리가 있으나 선율악기라는 점과 제한된 음역 때문에 대체악기로 생각해 보기는 어렵다. 소리가 큰 타악기만으로는 더 제한된 역할만을 하게 된다. 우리의 전통음악은‘듣는 음악’으로서 상당한 취약성을 갖고 있다. 특히 음악을‘하는 것’으로가 아니라‘듣는 것’으로 되어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점이 전통음악과의 접근을 막는다. 그런데 우리의 전통음악‘하는 음악’에 속한다. 따라서 불러보거나 실제로 연주를 해 보아야 그 음악의 묘미에 접하게 된다. 그래서 들려주기보다는 해보도록 유도하여야 한다. 그러나 연주와 노래하는 사람들의 습관을 보면 우선 들어보고 좋아야 실제로 하게 된다. 전통음악이 우리 사회에서 보편화되면, 교회에서도 더 쉽게 이를 수용할 가능성이 있다. 이는 대중음악적 성격의 복음성가가 쉽게 교회 안에 뿌리내린 것을 보아서 짐작해 본 것이다. 교회가 선교의 사명을 해내려면 통용되는 음악의 보편성을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악이 일반 사회에서 대중화되면 될수록 교회음악으로의 전망도 더 밝아질 것으로 기대 된다. 그러나 이러한 일을 교회가 수동적으로 따라갈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가 양악을 퍼뜨렸듯이 전통음악의 보편화에도 앞장서는 편이 더 떳떳할 것으로 여겨진다. 국악인을 전도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전통음악이 교회에 들어오게 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는 대중음악 가수들에게 복음이 전파되고 그들이 복음성가를 많이 부르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 대중가요 가수들에게 그들의 노래방법을 버리고 다른 식으로 노래하라고 말할 수 없다. 국악인들도 자신들의 방법으로 더욱 확신 있는 찬양을 할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한국전통음악의 교회수용 문제 (홍정수) http://um-ak.co.kr/gong/nonmun/hong-jeontong.htm

<읽기자료 3> 찬송가의 서문들 (초기선교사들도 언젠가는 한국의 가락으로, 한국인들이 만든 곡과 가사로 찬양할 것을 기대하였다!) * 최초의 개신교 찬송가인 <찬미가> 서문 요약 (1892, 감리교 감독교회 한국 선교부):
"번역에 의한 찬송가가 과연 (한국인들과) 잘 어울릴 수 있을까? 잘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우리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결론은 한국교회내에서 찬송가 작사가들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찬송가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작사가들을 배출하실 때까지의 빈공간을 메우는 선구자적인 길이요, 다리에 불과할 뿐이다." --> (참고) 감리교의 1892 찬미가는 곡없이 가사만 실린 찬송가였음. * 가사와 곡이 함께 실린 최초의 찬송가인 <찬양가> 서문 요약 (1894, H. G. Underwood): "이 찬송들은 대개 영어로 된 곡들의 번역이지만, 조금이나마 한국인 작사가들의 곡이 포함되었음을 기뻐한다. 앞으로 이들의 곡이 점점 더 많아지기를 희망한다." (초판 서문) "번역곡 대신에 한국인의 곡들이 많아지면 질수록, 그들의 가슴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재판 서문) * <찬성시> 서문 일부 (1895, 북장로교 선교부): "한국의 교회는 출발부터 예배를 위한 찬송가들이 필요했었다. 이 필요를 채우기 위한 번역곡들은 처음부터 불완전(imperfect)하고, 임시방편의(merely tentative) 곡들이었다..." 우리가 그동안 불러왔던 찬송가는 처음에 임시로 소개되었던 번역곡들이 대부분입니다. 초기 선교사들이 한국의 가락으로, 한국인들이 만든 곡과 가사로 찬양할 것을 기대한 반면, 우리는 오히려 한국적인 것들을 소홀히 대해오지는 않았는지 반성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2001년에 연합감리교회와 미국장로교회가 함께 출간한 <찬송과 예배>에는 한국의 전통적인 가락(장고 등 전통악기를 위한 악보 포함)과 한국인 작사작곡가들의 곡이 다수 포함되었습니다. <읽기자료 4> 이하는 찬양예배에 관한 글 김민호, '찬양을 생각하기 전에'--일부 요약 미국과 같은 선진국의 문화를 거의 종속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한국토양에서는 교회문화에서조차 별차이 없이 미국의 교회문화, 특히 찬양문화를 여과없이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습관적인 관행은 우리의 체질과 생활 양식을 무시하고 또는 한국인들의 정서를 배려하지 않고 외국의 찬양문화를 따라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한국의 교회와 찬양 문화를 이끌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한국은 외국의 창작품들을 번역하는 것으로 문화 소프트를 손쉽게 생산해내고 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우리는 유익한 것들을 얻게 되기도 하지만 우리와 다른 삶의 자리에서 오는 문화적 이질성들이 우리의 문화적 현실을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의 부족한 삶의 공간을 이질적 문화와 감성들의 기독교 문화가 차지하면서 문화적 종속을 만들어가고 있다. 찬양 문화가 교회를 위하여 많은 기여를 했고, 우리 교회가 문화적 부요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감사할 부분도 있지만, 문화 주체자들이 기독교 문화를 이끌어 가는 과정에서 생각해 볼 점이 많다.

(http://www.seejesus.or.kr/1-WEB-Seminar/changyang1.2.htm --> 인터넷상에 올라왔던 글인데, 더 이상 찾을 수가 없네요...) * 흔히 '경배와 찬양'이란 이름으로 번역되는 찬양예배는 전통적인 예배에 익숙하지 않거나, 잘 적응하지 못하는 미국의 젊은세대들을 위한 대안예배였습니다. 지금은 한국의 중고등부 학생들이나 청년들도 찬양예배를 선호하고 있으며, 찬양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그 속에서 삶의 변화를 경험하는 젊은이들 또한 많습니다. 특히, 찬양예배를 통하여 회중이 예배의 능동적 참여자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회중의 참여를 중요시하는 예배갱신운동(liturgical movement)과 만날 수 있는 여지도 많은 것 같습니다. 다문화 예배와 찬양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도움이 될만한 글들을 계속 읽어봅니다.

<읽기자료 5> 황병구 => 황병구님의 <예배인도자들을 권력독점의 한계에서 구출하기>라는 글에서 지적된, 찬양예배의 공헌과 문제점들 가운데 제가 인상적으로 읽었던 부분들을 요약해서 옮겨봅니다.
-공헌- (1) 찬양예배를 통해 회중의 참여가 확대되었다. (2) 온 몸으로 찬양하는 법을 알게 해 주었다. 그러나, 곡에 따른 분별이 있어야 하고, 몸짓이 의무감이나 습관에 의한 부산물이라면 자제해야 한다. -문제점- (1) 인도자들에 의해서 선곡이 독점되고 있다. 선곡의 유일한 기준이 회중의 반응이라는 것도 문제이다. (2) 획일화된 연주와 진행 스타일: 새로운 곡의 출처(모임이나 음반)에서 연주되고 진행되는 방식과 거의 동일하고, 악기의 편성도 비슷하다. 대부분이 빈야드나 호산나 인티그리티의 서구적 연주방식이다. 공동체적인 재해석이 필요하다. -> 사람마다 공동체마다 하나님과 맺는 관계와 표현이 다를 수 있는데, 현재의 획일적인 찬양예배에서는 개인과 공동체의 개성이 무시되는 경우가 많다. (3) 근거불명의 멘트와 곡해석및 적용: 곡과 곡 사이에, 아니면 후렴으로 넘어가는 긴 쉼박에 멘트를 해야 찬양예배인줄 안다. 옳지않은 곡해석과 적용도 많다. (4) 찬양인도자(섬김이?, 찬양지기?)들의 자질문제: 경험과 예배에 대한 기본 교육이 더 필요하다. 기술만 가지고 할 수 없다. 본질이 아닌 기술이나 방법만 배우는 경우가 많으며, 잘못하면 전문가나 매니아만 길러낼 수 있다. (5) 수동적 수용: "넘 좋아요" "함 들어봐요" 등의 피상적인 차원을 넘어서, 찬양곡의 모니터/피드백을 할 수 있는 적극적인 수용자가 되어야 한다. 현재는 적당히 은혜스러운 단어의 조합이나 귀를 즐겁게 해줄 만한 리듬과 화성을 갖추기만 하면 창작과 연주활동을 할 수 있는 상황이다. (6) 찬양(+신학)의 편중: 올네이션즈를 통해 소개된 외국곡들과 예수전도단및 굵직굵직한 개인사역자 중심으로 찬양곡이 불리워지고 있다. *** 회중의 스타가 되거나, 그 스타의 팬이 되고자 하는 이들이 많다. 예수 그리스도의 한 몸 이룬 예배 공동체(=교회)로서 찬양하자!!! 많은 물소리 찬양예배 관련 글 모음 http://www.thesounds.org/persp/read/list.asp

<읽기자료 6> Andy Langford, Transitions in Worship
-공헌과 가능성-
(1) 기존의 찬송가가 풍부한(rich and complex) 음악과 성경에 대한 시적인 표현을 통해 신앙과 말씀을 전달하고자 했다면, 현대의 찬양곡들은 성경구절의 반복과 기억하기 쉬운 음악을 통해 찬양을 부르는 이들을 무아지경으로 빠져들게 한다. 흥미있는 일은 예전중심의 회중들이 현대의 찬양곡들을 사용함에 따라, 점차로 성만찬, 세례, 교회력을 위한 곡들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찬양예배에 사용되는 곡과 가사가 20년후에는 훨씬 더 발전될 것이다.
(2) 비디오 프로젝션과 같은 기술의 발달로, 회중의 눈과 목소리가 위를 향하게 되었고, 양손이 자유롭게 되었다. 즉, 회중의 참여가 높아졌다.
-문제점-
(1) 비록 가사와 곡이 마음에 와닿고, 오래 남는다고 하더라도, 일평생을 통해 삶의 변화를 가져올만한 통전성을 갖고 있지 못하다.
(2) 하나님에 대한 호칭에서 아직도 남성편향적인 언어가 많이 쓰이고 있다.
(3) 공동체보다는 주로 개인(I, my, me)의 체험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4) 찬양예배가 따뜻하거나, 감동적인 느낌을 주기는 하지만, 지나치게 단순(simplistic and superficial)하고, 그 안에 내용이 별로 없다. 현대의 문화적 흐름을 너무 쉽게 쪼ㅈ아간다.
(5) 즉각적인 체험과 반응을 강조하다보니, 성례전이나 통전적인 말씀의 전달이 제대로 이루어지질 않는다. 역시 내용의 문제...
(6) 찬양리더를 추종하는 그룹으로 변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 문제는 찬양예배에 국한되는 문제는 아니다. 다양한 달란트를 함께 나누고, 사용하는 팀사역이 필요하다. (-> 많은 찬양예배 인도자들은 팀과 함께 비전을 나누면서, 함께 일하고자 한다.)

<읽기자료 7> 참고: Handt Hanson, Mission-Driven Worship: 선곡에 관하여...
(1) 가사를 잘 생각해 본다. 신학적으로 건전한가? 우리 교회의 비전과 방향에 잘 어울리는가? 등등. 예를 들어, 하나님과 성령에 대해 남성편향적으로 묘사한 곡들은 선곡에서 제외시키는 교회가 있을 것이다. 이 외에도, 군사적이 이미지, 성/인종 차별적인 (혹은 무감각한) 언어등은 피하는 것이 좋다. 가사의 선택에 신중하라!
(2) 가사의 이미지가 예배전체와 연결되고, 회중들의 삶과 연결되며, 그 속에서 변화(impact)를 가져와야 한다.
(3) 부르기 쉽고, 배우기 쉬우며, 오래 기억되는 곡으로 선곡한다. 한곡의 길이가 3분이상을 넘지 않게 한다.
(4) 다양성/공동체성을 추구해야 한다. 서로 다른 개인들이 모이지만, 그리스도의 한몸되어 보냄을 받는다 (나에서 우리로 옮아가는 것). God-focused, people-related.

<읽기자료 8> C. Michael Hawn, Gather into One Praying and Singing Globally: 다문화 예배와 찬양에 관하여.
(1)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된다는 것이 동일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The Unity as one body of Christ does not mean uniformity... 영어표현 요약함)
(2) 하나의 문화 속에서 나온 형태로만 찬양하지 않고, 여러 문화 속에서 나온 다양한 찬양을 함께 부를 때, 그리스도의 한 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 수있다.
(3) 서구교회가 특정한 찬송의 전통을 회중찬양의 중심으로 생각한다면, 우리는[서구교회는] '서구교회대 나머지 교회'라는 이원론의 위험에 빠지고 만다.
(4) 앞으로 우리는 예배와 찬양의 자민족 중심주의(ethnocentric dichotomy: 우리와 그들이라는 이원론)에서 모든 문화가 다함께 존중되는 다문화 예배와 찬양으로 옮겨가야 한다. --> the diverse ministries of the Holy Spirit!
(5) 이렇게 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모든 문화를 초월한 하나님의 진리와 상징들을 공유할 수 있고, 세상의 변혁을 위해 함께 일할 수 있다.

Diversity of Songs, Unity of Spirit! -마이클 헌(Michael Hawn)이 이해하는 예전적인 다원성(Liturgical Plurality)-
(1) 예전적인 다원성이 단순한 문화여행(ethno-tourism)이 되어서는 안된다. 이는 문화에 대한 피상적인 편견(streotyping)을 갖게 만든다.
(2) 예전적인 다원성은 개인의 신앙전통을 부인하지 않는다. 서로의 신앙전통을 존중하고, 비판하고, 배우는 의식적인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3) 예전적인 다원성은 다양한 형태를 하나의 보편적인 형태로 종합하기 보다는, 오히려 다양한 목소리를 인정하고, 그 안에 참여하고자 한다.
(4) 예전적인 다원성은 '반문화적인' 신앙의 표현이다. 이는 규범적인 문화를 강요하려는 시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예를 들어, 빠른 속도로 퍼져가는 오락산업(entertainment industry)등 북미 대중문화의 표현들이 예배 속에서 부적절하게 사용될 때, 그에 대한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것이다. 회중의 요구와 문화를 정신없이 쪼ㅈ아가다 보면, 그 문화의 포로가 되고만다. 반문화적인 신앙의 표현으로서의 예전적 다원성은, 하나의 문화적 관점을 우상화하는 포로상태(cultural captivity)를 거부한다.
(5) 예전적 다원성은 모든 문화 속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성육신(incarnation)을 경축(celebrate)한다. 수많은 문화들은 말씀이 '살'이 되셨다는 복음의 메시지와 역사 속에서 형성되어 온 기독교 예전의 전달을 위한 통로가 된다. (특정한 문화적 경험을 통해 보편적 진리의 인식이 깊어진다.)
(6) 예전적 다원성은 오랫동안 시야에서 가려졌던 이들에 대해 인식하게 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듣게 만든다. 즉, 예전적인 다양성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모든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식탁에 초대한다.
(7) 마지막으로, 예전적인 다원성은 종말론적인 희망을 갖는다. 예전적인 다원성은 하나님의 나라를 미리 맛보는 것이다. 미국의 규범적인 문화에 길들여진 많은 사람들은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교회가 궁극적인 실재가 아니라는 것을 쉽게 잊어버린다. 예전적인 다원성은 전통이냐 현대냐 하는 이원론적인 논쟁에 휘말리기 보다는 다양한 문화적 표현을 존중하는 가운데, 궁극적으로는 문화를 초월하여 세상을 위해, 세상과 함께 기도하는 공동체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 계속...

*** "다문화/한국화 예배는 '말씀'이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살'이 되셨다는 복음의 메시지와 특정한 문화적 경험을 통해 보편적 진리의 인식이 깊어진다는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이 예배를 통해 우리는 자연스럽게 '코리안 아메리칸 크리스챤'이라는 자존감(self-respect)을 갖게되고, 자신은 물론, 다른 인종과 문화를 존중하는 훈련도 받게 됩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 사랑과 더불어, 다른 피조물에 대한 사랑과 존중이야말로 기독교 영성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예: JX, 웨슬리) 한국적인 예배를 통해 긍정적인 자아가 형성이 될 때, 하나님과 나 사이의 회복된 관계가 이웃과의 관계의 회복으로 이어지는 '성령충만한' 예배가 될 것입니다."